런던일기/2010년

[book] 아주 사적인, 긴 만남

토닥s 2010. 11. 12. 19:54
YES24 - [국내도서]아주 사적인, 긴 만남

이미지출처 : www.yes24.com

마종기, 루시드폴(2009).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웅진지식하우스.

 

루시드폴이 진행하는 세음행을 듣기는 했지만(세음행은 루시드폴이 진행하기 이전부터 들었고, 진행자가 루시드폴로 바뀌었다기에 '이건 뭔가'했더란), 그의 음악을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적이 없었다.  그가 좋아한다는 시인 마종기라는 이름도 낯설고.

그냥 편하게 읽을 무엇인가를 찾아 손에 넣었는데.  책장을 넘기면서 드는 생각들이 내 처지와 묘하게 물려 빠르게 읽었다.  내 처지와 묘하게 물려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100%공감하기에는 그들의 처지와 나의 처지가 너무 달랐다.

 

한 번도 루시드폴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적은 없지만, 잘나가는(?) 프로젝트1인밴드면서 스위스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정보만으로 그저 잘나가는 서울 샌님 깍쟁이겠거니 생각했다.  스타일로 보아 서울태생 샌님은 맞는데 서울 깍쟁이는 아니었다.  부산에서 자라 부산을 고향이라고 생각한단다.  '바다를 안다면 샌님 깍쟁이라 할 순 없지'라고 생각하고 후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음악과 학문 사이에서 고민하기는 하지만, 그런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속에서 나와 생기는 거리를 결국은 극복하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 거리감의 실체는 시셈일지도 모르겠다.

 

루시드폴이 흡모했다는 마종기 시인.  미국에 살고 있는 의사면서 시인.  책의 중간 중간에 묻어나는 내용으로 비추어 부모로부터 받은 문화적 자본을 양분으로 열심히 살아온 분이라고 추측만 할 뿐 나는 이 시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본인 표현으론 '쉬운 시'를 쓴다고는 하지만, 루시드폴의 표현(단어)에 대해 뚜렷한 자기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쉽게만 시를 쓰는 시인은 아니라고 혼자 생각했다.

 

두 사람의 음악도, 시도 제대로 접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을 읽었지만, 이 책을 읽고서 두 사람의 음악과 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다다르지 않았다.  그러기엔 요즘 밀려 있는 일들이 너무 많다.  사실 이미 자신의 것을 찾은 사람들을 향한 시셈이 음악과 시로 닿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책의 기획이 있고, 메일 교환이 이루어졌는가이다.  그럴 것 같은 느낌 98%지만.  열심히 읽었던 책의 저자와 연락을 주고 받는다는건 독자된 입장에서 정말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상업적으로 이용된 것도 같아 씁쓸하다.  이런 기획이 아니고서 루시드폴과 마종기 시인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면, 그건 정말 아름다운 사건일테다.

 

이런저런 거리감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책의 어느 구절을 읽다가 터지고 말았다.

나에게 새 대통령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나라의 위상을 생각해 내 소원에 귀 기울여준다면, 오랫동안 가슴에 응어리진 소원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입양아에 대한 것입니다.  혹시 알고 있나요.  80년대와 90년대 중반 이후까지 한국이 외국으로 입양 보내는 아이의 숫자가 세계 최고였다는 사실을요.  물론 운이 좋아 잘된 아이들이 많기는 하지요.  그런데 내 전공이 소아방사선과여서 잘못된 한국 입양아 때문에 미국 재판정에 여러 번 나갔어요.  10년 전쯤에는 내가 이런 일을 글로 써서 몇 번 발표한 적도 있지요.  그랬다가 미국에 있는 홀트 입양회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버릇을 고친다고 말도 못 알아듣는 한국 입양아를 심하게 때려서 죽인 사진을 보고 분통이 터져 '고아의 정의'라는 우스운 시도 쓴 적이 있어요.  도대체 누가 이런 사실을 숨기는 거지요?  바로 지난주에도 인디애나 주에서 양부모가 한국인 입양아를 심하게 흔들어대서 죽었다지요.  작년인가, '입양한 우리애가 말을 안 하니 봐달라'고 간청하던 미국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집에 가보니 입양된 후, 한 달 동안 단 한마디도 안하고 있는 세 살배기 한국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방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벌거벗은 짐승처럼 나를 바라보았지요.  그 아이는 내가 건넨, 미국에서 들은 한국말 한 마디 '이름이 뭐냐?'라는 질문에 무작정 왕왕 울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입양아가 언어장애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엉뚱하게 증명해준 적도 있지요.  이 아이가 왜 한국말 한 마디에 구집을 꺾었을까요?  한국 사람도 살 수 있는 동네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 아닐까요.
물론 이제는 외국에 입양을 보내는 숫자가 세계 1위는 아니랍니다.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며칠 전에 읽은 "뉴스위크"에서는 이제 한국이 4위라고 하더군요.  중국, 소련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테오피아가 1,2,3위, 한국은 그 다음이더군요(마종기, 루시드폴, 2009. pp.95~96).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 책으로 마음을 열기도 했지만, 이 책의 저자들과 멀어지기도 했다.  저자들보다 나는 '이름이 뭐냐?'는 한국말 한 마디에 울음을 터뜨렸던 세살배기 아이에 더 가깝다는 걸 스스로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