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다./World

[mylai] 미라이, 아니 선미

토닥s 2007. 1. 27. 06:53



미라이, 아니 선미 마을은 가이드북엔 나와있지 않다. 내가 정리를 위해 빌린 가이드북 <세계를 가다>, 이것도 나름 이름있는 가이드북 시리즈다, 뒤쪽에 2도 컬러로 한 단락쯤 나와있다. 그래서 방현석의 여행기에 나온 단 한 줄, 끄앙응아이로 들어가 갈림길에서 왼쪽길을 따라 간다,는 글을 보고 찾아갔다.

다낭 가까이 꼭 가볼만한 곳으로 호이안과 미선 유적지를 꼽는다. 다낭을 출발하며 미선 유적지냐, 선미 마을이냐. 갈 곳을 정하는데 의견의 갈림이 있었다. 결론은 미선 유적지는 다시오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여행지니까. 하지만 선미 마을은 쉽지 않은 곳이다라는 이야기들이 오갔고, 가보고 싶다는 의견이 다수인 가운데 미선을 꼭 가보고 싶다는 의견을 가진 이는 없어 선미 마을로 가게 됐다.




선미 마을이 어떤 곳이냐고? 베트남에 대해 쌀국수, 아오자이, 하롱베이 외 조금만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군에 의한 '미라이 민간인 학살'을.

선미는 미라이mylai의 베트남 지명이다. 미라이는 미군이 임의대로 구획을 나누어 자기들 편의대로, 군사용으로 나눈 지명이다. 베트남 지명 발음이 쉽지 않아 그랬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우리 지명에 노근리가 있다고 치자. 미군이 발음하기에 쉽지 않음으로 자기들에게 익숙한 노엘 등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노근리를 그렇게 불렀다는게 아니라 예를 들자면. 그래서 선미 마을 인근 지역은 미라이1, 미라이2, 미라이3 등 이렇게 나뉜다.

선미 마을에서 일어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네이팜탄에 화상을 입고 뛰어가는 어린 킴푹의 사진과 더불어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그것이 얼마나 비양심적이며 반인류적인 전쟁인가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런 계기들이 쌓여 전세계적으로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이런 흐름과 베트남 저항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선미 마을터에 지어진 이 기념관은 선미 마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정보가 있는 전시관도 있고, 당시 마을터의 흔적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그리고 이런 총탄의 흔적까지도.





기념관에 가면 단체의 경우 영상을 보여준다. 미군에 의한 선미 마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그 영상은 베트남어, 불어, 영어 버전이 있다. 영상에 대한 글을 읽기도 하였고, 또 선미 마을에 대한 글을 읽기도 하였기 때문에 그림과 같이 보면 대략 이해가 간다, 일행은 영어 버전을 봤다. 그런데 같이간 분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듯. 그래서 각자가 느끼는 공포(또는 분노)의 정도가 달랐다. 영상을 보는 동안 지루해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그 영상의 한국어 버전을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번역과 자막이 작업이 전부였지만.

나와 우리라는 단체의 도움으로 영상을 한국으로 가져왔다. 인편으로 가져오는데만 거의 1년이 걸렸다. 베트남에 가는 사람은 많지만 선미 마을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반 년만에 한국에 가져왔으나 어처구니 없게 pal변환을 부탁했던 후배가 지하철에서 잠들었다 급하게 내리다 두고 내려 잃어버렸다.(ㅜㅠ )). 다시 가져와 한글 자막을 넣어 다시 보냈다. 그때는 아무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직접 변환했다. 그 뒤 내가 베트남을 다시 갈 기회가 없어서 그 영상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불행히도 그 기념관은 홈페이지 같은 것도 없다.
















당시의 방공호. 아이들의 키높이다.



기념관 내 마을터는 당시의 집터를 그대로 두었다. 재현이랍시고 어설프게 만든 집들이 있었다면 내가 받은 강렬함이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내버려둔, 더 이상은 사람이 살지 않는, 하지만 시간이 흘러 초록풀이 뒤덮은 집터가 나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전시관의 일부에서 영상을 보고 나와 가이드와 함께 마을터를 둘러보았다. 이 가이드는 지역 주민이다. 이 지역 출신인데, 일반적인 설명이 있고서 사람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물론 그 질문의 강도는 셌다, 일행들의 대부분이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다보니. 답을 하는 가이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분명 이 가이드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일텐데 말이다. 베트남어를 모르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도랑은 예전부터 있어오던 것으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농수로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선미 마을 학살 당시 이 도랑은 핏물이었다는 가이드의 설명. 무성하게 자란 물풀이 무섭게 느껴졌다.







마을터를 둘러보고 사진과 자료를 보여주는 전시관에 들어갔다. 설명을 보던 중 무엇인가를 발겼다. 그 전시관의 설명은 우리가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을 America's war in vietnam이라고 쓰고 있었다.

어떻게 이름짓고 부르는가에 그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봤을때 베트남전쟁에 대한 베트남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도 글을 쓰면서 가능하면 '미국에 의한 전쟁'이라고 쓰려고 노력한다. 물론 습관적으로 써버리는 말들도 있지만.




그렇다면 선미 마을 민간인 학살의 내용은 어떠했길래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 있으켰는가. 500여 명이 조금 넘는 마을 주민 중 미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마을엔 507명의 민간인이 있었고, 이들 중 504명이 죽었다. 단 3명이 살아남아 그 현장을 증언했다.

미군이 마을에 들어와 찾았던 것은 베트콩이었다. 베트콩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시 마을에 있었던 대부분은 아이들과 노인, 그리고 여성이었다. 이는 나이와 함께 쓰여진 사망자의 명단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베트남식 이름에 '티'thi라는 것은 여성의 이름에 잘 쓰는 일종의 중간 이름middle name이다. 베트남친구 투항의 풀네임도 응웬 티 투항이다. 학살당한 많은 이의 이름에는 thi라는 글자가 분명하다.












이 나무 부조도 어린 킴푹의 사진만큼이나 유명한 사진,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사진을 형상화했다.



선미 마을의 학살을 살아서 증언한 세 사람의 생존자의 사진이 전시관에 걸려있었다. 이름을 써두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이 사진 속의 할머니가 바로,



이 할머니다.

할머니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 때, 학살이 일어났던 때,도 그랬던 것처럼 마을터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손녀와 먹을 수 있는 풀을 뜯으며 말이다.


+ 기록에 의하면 선미 마을에서 미군에 의해 학살당한 베트남 민간인의 수는 504명이다.  그리고 이날 미군도 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마을에서 미군이 다쳤으니, 베트콩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단 한 명의 부상자인 미군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학살의 현장을 견딜 수 없었고 그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쏘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학살을 막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 미군은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군인이니까.  자신의 발을 쏘았던 그 미군은 살아 남아 그날을 증언하는 또 한 명의 증언자가 되었다.

그날 선미 마을에 있었던 사람human은 마을주민 507명과, 그 중에 504명이 죽었다, 자신의 발을 자기 총으로 쏜 한 명의 흑인 병사뿐인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