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1년

[project] 생각다듬기 - untitled

토닥s 2011. 9. 1. 02:59
#01.
런던에 오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홀비시티 Holby city라는 병원 드라마를 열심히 봤다.  뉴스는 도저히 알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나마 드라마는 그림만 봐도 이해가 되니까 즐겨 봤다.  주로 TV를 틀어놓고 얼굴은 노트북이 박고 있었지만.  그러던 어느날도 홀비시티를 보고 있었다.  보고 있었다기 보다는 듣고 있었는데, 켜놓은 TV에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놀라서 고개돌려 자세히 보니 한국말이 맞았다.  한국말이긴 했는데 정확하게는 북한말이었다.  북한 난민인 부부가 샴 쌍둥이를 출산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였다.  난민 지위인지라 보통의 케이스와는 약간 달란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 부부는 영국의 의료혜택을 받았다는 그런 에피소드.  그걸 보고 당시 룸메이트였던 아이에게 이야길 했더니 런던에 북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마침 그 친구 주변에 난민 지위 신청을 한 알바니아 친구가 있어서 룸메이트도 난민에 관해 약간의 정보가 있었다, 북한 사람들을 포함해서.  그 때 그 친구의 말이 한인타운의 식당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식당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인 것처럼.

#02.
이후에 스스로를 북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나를 보고 일본 사람 또는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더듬더듬 영어로 말을 걸어온 분이었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한국말을 나누는 걸 보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한국 사람이냐고.  그렇다고 하니 본인은 북한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직업군인이었다고.  50세가 훌쩍 넘은 분답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부산이라 하니 친구들이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에서 일한다고 했다.  속으로 '북한 사람인데 부산 영도는 어떻게 알고, 한진중공업은 어떻게 알아. 간첩아냐?' 했는데, 그랬단다.  북한에서 직업군인이니 그런셈이다.  그 분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탈북한 군인인가보다, 친구들은 남한으로 본인은 제3국으로 왔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서 안 일이지만 영국에 있는 북한 사람들은 탈북해서 남한으로 가지 않고 곧 바고 제3국인 영국으로 온 사람의 수도 적지 않지만, 남한으로 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남한의 여권으로 영국에 체류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안타깝지만, 그런 경우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불법체류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03.
W에 일하면서 북한말을 하는 청년 셋을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봤다라고 해야 맞는 표현, 통성명을 하지 않았으니.  그냥 조선족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족인 경우 국적은 중국인 셈.  그런 경우 여기서 일을 하고 있다면 대부분 학생비자 소지자.  어느날 그 청년 셋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한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떻게?'라고 혼자서 생각하다 매니저에게 물었더니 탈북자란다.  그 이야기 들으면서 '헉'했다.
매니저가 덧붙인 말이 애들이 고생이 많다고.  그 친구들 경우는 남한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제3국인 영국으로 와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난민들에겐 생활보조금과 주택이 주어지는데, 그 친구들의 경우는 버밍엄 지역을 배정받았다고 한다.  매니저 말이 생활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 그냥 시간을 죽이는 일, 그 이상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그 혜택을 포기하고 런던으로 왔다고 한다.  일하면서 제 힘으로 살기 위해.  W에서 했던 일은 힘은 들지만 배워두면 나중에 일본레스토랑에서라도 일할 수 있으니 열심히하라고 매니저는 그 친구들을 다잡곤 했다, 마치 동생들처럼.  그 이야길 들으면서는 '흑'했다.
그 친구들의 경우는 십대 초반에 탈북해 영국에 오기 전까지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해 영어가 남한의 또래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했다.  영어 수업도 들으려고 하지만 W에서 하는 일이 고되다보니 그도 쉽지 않다는.  그런 아이들이 월급 날에 월급받았다고 스타벅스에 가서 까페라떼를 사들고 온거다.  마음이 씨려서 목구멍에 라떼가 넘어가질 않았다.
뭘 해줄 수 있을까, 뭘 도울 수 있을까 생각만하면서 그 청년들을 훔쳐봤다.  그러다 트레이닝 기간이 끝나서 나는 더 이상 그 W에서 일하지 않게 됐다.  더 연을 이을 기회가 사라졌지만 그 청년들을 계기로 이곳의 북한 사람들에게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
겁도 없이 그 북한 사람들을 다큐먼트리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꼭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04.
일년이 훌쩍 지나 내가 집에서 가까운 W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 브런치로 이전에 봤던 청년이 옮겨 온거다.  일손이 모자라 매니저가 땡겨온 모양이었다.  몇 주쯤 지켜보다 한국말로 인사를 건냈다.  "아 한국 사람이세요?" 반갑게 말을 받는다.  내가 일년 전쯤 다른 브런치에서 봤다고 하니까, 자기는 기억을 못하는데 어떻게 자기를 기억하냐고 그런다.  다른 두 친구는 잘 있냐고 하니, 그건 또 어떻게 아냐며 화들짝 놀란다.  서로 뻔한 이야기지만, 당황스러운 소재일 것 같아서 '탈북자'같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단지 검은 마음을 품고 좀 친해져야겠다고 혼자서 생각했다.
그 뒤로 볼때마다 반갑해 인사를 해왔고, 나는 틈틈이 그 친구를 관찰했다.  나름대로 외국인 스태프들과 영어 한 마디라도 써볼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여자 스태프들에겐 흑기사마냥 나서서 도움도 준다는 것도 눈에 보였고.  내게도 틈틈이 말을 걸어 왔지만, 어느날 나는 내가 겁없는 마음을 먹었다는 걸 진심으로 깨닫게 됐다.  그 친구는 나름 자신을 포장하고 있었지만, 그 친구는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거칠었다.  참 표현하기 힘들지만, 그 친구의 삶이 너무 거칠어서 감히 내가 다큐먼트리 할 수 있을까 스스로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지었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거칠고, 내가 책임감 없이 그 친구들의 삶에 뛰어 들어서 할 수 있는게 없다고.  뛰어들 수는 있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는거다.  그래서 이 주제는 그냥 엎기로 했다.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주제는 이름도 정해지지 않고 엎어졌다.

#05.
한국에서 사진하는 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영국의 탈북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눈을 반짝이며 '재미있겠다'고.  런던에 왔던 서선배도 그런 반응이었지만 나는 자신이 없다.  그래도 이 소재가 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서선배에게 넘기고 나는 현지조사로 껴달라고 할까?  왠지 서선배라면 그 사람들을 꺼리로 써먹지 않고 나보다 더 따듯하게 감싸줄 수 있을 것 같다.  FTA 건으로 농촌에 취재가서 농민회 분들과 친구가 된 사람이니까.  정말 서선배에게 넘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