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0년

[life] 마음 속에 새겨진 대통령

토닥s 2010. 8. 21. 00:56
지금 장 지글러의 <빼앗긴 대지의 꿈>이란 책을 읽고 있다.  널널한 기분으로 엎드려 초코칩 쿠키 먹으면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먹먹해져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도 책 속에 담긴 내용이 준 자극이 식지 않아 넓지도 않은 방안을 혼자서 한참동안 왔다갔다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책은 '서양의 원죄'에 관한 것이다.  아프리카는 물론 아메리카까지 얼마나 말못할 짓을 했는지.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볼리비아의 이야기다.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지금까지 벌여온 정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에보 모랄레스는 라틴 아메리카, 아니 아메리카 500년 역사에 처음 당선된 인디오 대통령이다.  공식적인 취임식에 앞서, 바로 전날, 그는 어머니 대지를 받든다는 인디오 제례를 거쳤고, 인디오들은 그를 대표자로 받아들였다.

다 읽고 나면 간단하게 정리하겠지만 그래도 이부분은 그 내용과 따로이 남겨두고 싶었다.  그가 5세기에 걸쳐 학살당하고 갈취당한 인디오들에게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공동체 경영진이 우리를 맞아준 시멘트 건물 근처에는 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밝은 빛깔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로, 벽은 온통 흰색이었다.  253명의 어린이들이 그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도에서 주는 박봉을 받는 여자 선생님 한 명과 남자 선생님 두 명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이들이 우리를 맞이하는 방식은 매우 엄숙했다.  경영진의 구성원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발언했다.  펠리시다드는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사람의 말은 적당히 끊는 센스를 발휘했다.
  육중한 회의 테이블 뒤쪽 벽에는 먼지가 잔뜩 쌓인 액자 속에 눈에 익은 세 가지 이미지가 담겨져 있었다.  볼리비아의 문장과 녹색 노라색 빨간색 리본으로 장신된 칼을 찬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화, 그리고 안토니오 호세 데 수쿠레의 초상화, 이렇게 세 가지였다.  액자 속 두 해방자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들처럼 요란스럽게 장신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아니, 그렇다면 에보 모랄레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는 이들처럼 아이마라족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500년 이래 처음 맞이하는 인디언 출신 대통령이 아닌가?  순간 장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돌이키기 어려운 실수를 한 것은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펠리시다드는 한참 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식수 담당과 가축 담당, 총무, 부회장이 모두 똑같은 동작을 취했다.  이들의 제스처가 갖는 의미는 명확했다.  혼혈 출신 장군들은 벽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에보는 자신들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장 지글러,2010, p.253)

비록 민영화된 국가 주요 산업을 다시 국유화 시키면서 각종 이념 세례에 시달리고 있고, 이와 관련해 초국적 자본으로부터 생명조차 위협받고 있는 대통령이지만 그는 분명 행복한 대통령임이 틀림없다.

나조차도 이전에 에보가 께추아(잉카어)도 하지 못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진짜 인디오로 볼 수 없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기사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념의 필터를 여러차례 거친 기사가 아니었나 싶다.


나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대통령을 가지고 싶다.


+1 MB도 혼자서는 행복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기만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
+2 글 제목을 '가슴 속에 대통령'이라고 쓰려다 한국의 정치에서는 잘못(?) 읽혀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책의 한 구절을 그대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