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0년

[life] 마지막 선물

토닥s 2010. 8. 10. 20:47
아버지가 데려온 새어머니가 매서워 나고자란 두뫼산골을 등지고 부산이라는 도시로 시집을 갔다.  시집은 대가족이었다.  먹고 살만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집을 왔지만, 그도 듣던바와 달랐다.  남편과 시가족은 다들 그러하듯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남편과 대가족이 다닿은 곳은 일본의 오사카와 가까운 고베.  고베는 강제든 그렇지 않든 일하러온 조선사람들이 많았다.  항구여서 공장, 군수공장이 많았다.  집안의 일할 수 있는 남자들은 공장으로 일하러 갔고, 여자들은 조선 사람들이 일하는 공장에서 밥장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두 딸을 낳았다.  열아홉살, 스무살 때 일이다.

날이 갈수록 먹고 살만해졌지만, 날이 갈수록 연합군의 비행기 공습도 잦아졌다.  밥을 먹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겨우 걸음마를 뗀 큰 딸의 손목을 잡고, 작은 딸은 등에 업고 반공호로 달려가야했다.
비행기 공습이 매일되고, 고베와 반대편인 서쪽 도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엄청나게 크고 뜨거운 폭탄이 떨어진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그 말은 조선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이웃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편과 시가족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 사이 불어난 가족을 모두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가 날마다 미어터졌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한 명도 빠짐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딸 셋과 아들 넷을 더 낳았다.
다자란 딸 둘에게 나머지 아이들을 맡기고 여러 가지 장사를 하였다.

비록 시의 땅이긴 하지만, 이를 임대해 집을 지었다.  그리고 남편이 죽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계속 장사를 했다.  자식들이 하나둘 결혼해서 집을 떠나갔다.  같은 자리에, 여전히 시의 땅을 임대해 새롭게 2층짜리 집을 지었다.  막내 딸이 결혼해 집을 떠나고 그 2층 집에 혼자 남았다.

먼 도시에 살던 큰 아들이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함께 살기를 바랐으나 떨어져 살았다.  그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큰 아들이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한다.  가진 것 모두를 큰 아들에게 주고, 2층 집은 세를 주고 큰 아들과 살기로 하였다.  바람대로 아들, 손자들과 살게 되었으나 아무래도 편하지 않았다.  큰 아들이 사업에 실패하고 작은 집으로 옮겨가야해서 큰 아들 집을 나와야 했다.  그래서 2층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전 남편을 잃은 큰 딸에게 아랫층을 세주고 함께 살기로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건강하던 큰 아들이 죽었다.  동네 병원에서 감기주사를 맞고 심장쇼크로 죽었단다.  믿어지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아도 사실이었다.

2층 집에 홀로 앉아 드문드문 찾아오는 딸들과 나머지 아들들을 기다렸다.  기다림이 유일한 생활이 되었다.  근래들어 조금전 무엇을 했는지 잊는 일이 잦아졌다.  딸들과 나머지 아들들이 의논한 끝에 노인들을 돌보는 시설로 가기로 하였다.  아랫층에서 식사와 살림을 돌보던 큰 딸이 몸이 불편해져 더 이상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자고는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노인들과 함께, 하지만 홀로 병실에 앉아 여전히 드문드문 찾아오는 딸들과 나머지 아들들을 기다렸다.  2010년 8월 6일 계속 된 기다림을 그만두게 되었다. 

지난 금요일 아침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작은 언니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고 생일축하 인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언니의 첫마디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였다.

그렇지 않아도 금요일 하기로 했던 자원봉사 인터뷰의 시간 약속이 담긴 메일을 받지 못해 마음이 초조하던 날이었다.  저녁엔 두 달전 예매했던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데, 그 시간과 인터뷰 시간이 겹칠까봐 초조했던 차였다.  조마조마하게 전화를 기다렸고, 기다린 전화는 아니었지만 언니의 전화라 반가운 마음에 받았던 것이다.

일단 엄마와 통화를 해야할 것 같아, 집으로 엄마 아빠의 휴대전화로 부지런히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곳도 받지 않았다.  겨우 아빠와 통화를 했는데, 엄마는 할머니가 숨을 거둔 후 겨우 병원에 도착했다가 집에 잠시 다니러 갔다고 했다.  다시 집으로 엄마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언니와 조의금 따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분주한 가운데 인터뷰 시간 연락을 받아 나는 인터뷰를 위해 집을 나섰다.  인터뷰를 한 곳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기로 하였지만, 공연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국으로 전화해볼까 생각도 하였지만, 시간이 늦어 다음날 하기로 하였다.

공연장 근처에서 만난 지비는 먼저 "sorry about your grandma.."라고 말했고, "why today"라고 말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도, 어느 누구도 정할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어느 누구도 나에게 한국에서 생일을 축하한다고 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때서야 나도 '왜 오늘'하고 생각했다.

나는 돌 사진이 없다.  돌잔치도 치르지 않았다.  살림이 더 어려웠어도 언니들의 돌잔치는 치러졌고 돌 사진도 찍혀졌지만 나의 돌잔치는 치러지지 않았다.  계획된 돌잔치 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먼 곳에서 지비와 맞는 첫 생일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친가쪽 할아버지 할머니는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의 부음에 엄마는 나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부음에 이천에 사는 큰 언니 부부가 부산으로 왔다.

그날 외할머니는 비록 엄마에게 큰 슬픔을 주었지만, 내 생일로 적적해할 그날을 잊을 수 있도록해주었고 또 멀리 사는 큰 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어쩌면 외할머니가 엄마와 나에게 남긴 마지말 선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외할머니의 고단한 몸이 이제 평안해지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