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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다./Korea

[Korea2024] 모든 것들의 최선

by 토닥s 2024. 9. 29.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수요일 새벽이었다.  그 주 월요일엔 언니가 중국에 답사/연수를 갈 계획이었다.  끝까지 갈까 말까를 망설이던 언니는 함께 준비한 사람의 '함께 갔으면'하는 바램을 듣고 가기로 방향을 정했다.  월요일 출발을 위해 일요일 언니네로 돌아갔다.

월요일 오전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갔더니 아버지가 의식이 없는채로 끙끙 앓고 계셨다.  간호사분이 조심스레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릿 속이 하얗게 됐다.
 
집으로 돌아와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공항으로 나서려고 준비를 하고 있던 언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언니가 일행들에게 다시 연락을 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중국에 가지 않겠다는 언니의 연락을 받았다.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언니가 중국에 갔으면 아버지 장례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을뻔.
 
언니와 함께 병원을 찾은 다음날은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우리는 현실적인 것들을 의논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 요양병원에 계시다고 하니 먼저 부모님을 보내드린 언니의 지인들이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줬다고 한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원하는 병원에 가고 싶다고 갈 수 없듯 장례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장례 치를 곳을 우리와 조문객의 편의에 맞춰 몇 군데를 순서대로 정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차례대로 전화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수요일 장례 뒤 아버지를 모실 곳 - 추모공원들을 직접 가서 보고 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수요일 새벽 돌아가셨다.  차로 5분 거리 요양병원에 모시고 매일 보러 갔는데도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간호사분들은 "그래도 매일 오셔서 보시고 해드릴 수 있는 만큼 해드렸다"며 "마지막을 우리가 지켜드렸다"며 위로해 주셨다.
 
엄마를 부축해 자리에 앉혀드리고 언니는 장례식장으로, 나는 멀리 사는 큰언니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병원으로 가는 사이 먼저 전화를 했던더라 큰언니도 조카들을 챙겨 내려올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우리가 위치면에서 괜찮다고 생각했던 장례식장에 공간이 있어 그곳으로 모시기로 했다.
 
장례식장에서 오는 운구용 차량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집으로 가서 런던으로 갈 준비를 마친 지비와 아이를 데리고 요양병원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장 근처인 언니네에 엄마, 지비 그리고 아이를 내려놓고 언니와 나는 장례식장으로 갔다.  접객용으로 쓰일 공간 몇 군데를 둘러보고 조문객의 수를 예상해 공간을 정하고, 장례 절차에 쓰이는 물품들을 정하고, 계약하고..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이었다.  언니나 나나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장례를 이렇게 앞장 서서 준비해 본 경험이 없어서 장례식장에서 일하시는 분께 "잠깐만요", "그게 뭔가요", "어떻게 하지" 이런 류의 대책 없는 대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덕분인지(?) 장례식장에서 일하시는 분이 '알아서' 현실적인 선택지를 주셨다.
 
다른 사람들의 여름 휴가에 잘 맞춘(?) 아버지 덕분에 많은 가족들이 다녀갔다.  소식 듣고 멀리서 온 친구들, 선/후배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멀리 사는 처지라 다른 사람의 경조사를 잘 못챙기고 산다.  그래서 나도 이런 소식을 갑작스레 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멀리 살아도 문득문득 소식 전해도 어색함이 없는 친구들, 한국에 오면 챙겨 만나는 친구들에게만 소식을 전했다.  딱 아버지 장례에 맞추어 우연하게 연락이 닿은 친구도 있었다.  
 
어려서는 '슬픔이 나눈다고 줄어드나' 싶은 생각을 했는데,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직접 찾아와준 가족들은, 친구들은 물론이고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선/후배들이 보내온 연락은 정말 큰 위로가 됐다.  
 

 
오랜만에 본 친척들은 아이를 보고 신기해(?)했다.  딱히 또래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혼자 지내는 아이가, 심심하면 조문객들의 신발 정리를 담당한 아이가 신기했던 모양.  덕분에 용돈도 많이 받았다는..
 
장례는 가족/친척들의 생활권인 부산에서 치뤘지만 부모님의 현재 거주지가 부산이 아닌 관계로 경남 창원까지 가서 화장을 해야 했다.  다행히 언니의 주소지가 부산이라 경남에서 화장한 다음 부산의 한 추모 공원에 모실 수 있었다.  언니가 중국에 예정대로 갔었으면 이것도 어림 없는 일이었다.  휴 -.  

 

장례식 2주 뒤 완성된 사진 타일

 
언니들과 나는 좀 실용적인 편이고, 형부는 우리들의 의견을 무조건 존중해주는 스타일이다.  이제 집에서 가장 어른은 엄마지만, 언니들과 대부분 의논해서 결정했다.  친가의 사촌들이 여름 휴가를 대신해 부산에 내려와 장례식장을 지키며 조문객맞이를 도왔다.  사실 우리는 조문객이 없는 늦은 시간은 장례식장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 쉬어도 된다는 실용주의인데 형부와 사촌들이 조문객도 없는 장례식장을 밤새 지켰다.  덕분에 엄마와 우리들은 체력조절을 해가며 장례를 마칠 수 있었다.  앞으로가 걱정이라며 우리들끼리 웃었다.  우리도 집안 어른들 장례식장 밤새 지켜야 하는 것이냐며-.  그럴 자신 없다며-.  나는 멀리 사니까 모르겠다며-.
 

 
 
출상 전 날 사촌들과 기념사진.  찍어놓고 우리들끼리 아담스 패밀리 같다고 웃었다.
 
울고, 웃고 함께 해준 가족들과 친구들, 너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