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6년

[etc.] 주말 일기

토닥s 2016. 4. 18. 22:52

일을 하지 않는, 물론 집에서 육아라는 중노동을 하고 있긴 하지만, 나도 일요일 밤이 되면 무척 꿀꿀하다.  다시 월-금 독박육아(?)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물론 주 4일은 지비가 퇴근해서 돌아와 누리와 놀아주지만, 가끔/종종/자주는 둘이 다투면 내가 하던 집안일을 멈추고 해결해야 한다.  한 일도 없이 바쁘게 보낸 주말의 기록.


토요일


4월 16일 오후는 오래전부터 비워두었다.  하지만 내 볼 일이 있다고 누리와 지비를 소홀히 대하면 뒷탈이난다.  그래서 오전은 가족시간 - 다 함께 내가 보고 싶었던(?) 영국(국립)도서관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2015년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탄생 150년이 되는 해였고, 지금까지 관련 이벤트들이 이어지고 있다.  4월 17일이 전시 종료일이라 16일에 꼭 가야했다.  그런데 비오는 날 비를 헤치고 가서보니 너무 지쳐서 커피를 먼저 한 잔 하기로 하고 까페를 찾았다.  그런데 뭔가 우리하고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여행객들이 많은 동네 King's Cross라는 지역이라 관광객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도서관 까페인데도 찍! 소리 내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 - 에서 우리는 스티커를 붙였다.  영국생활 13년차 지비도 처음와보는 영국(국립)도서관 -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막 웃었다.



가끔 지비 회사에 한 단체가 들어와 (이월도서 같은) 책들을 절반 이하 가격에 판다.  점심시간에 구경하다 사들고 온 책1.  그런데 이 스티커 책이 모자이크를 모티브로 런던의 명물들을 만드는 것인데, 우리가 대충 붙이면 되는게 아니라 붙여야 할 스티커가 정해져 있고, 꼭 그 스티커를 붙여야 이미지가 완성된다.  그런데 너무 디테일해서 우리도 빨리 찾아내기 쉽지 않고, 누리는 정해진 대로가 아니라 아무렇게나 많이 많이 붙이고 싶어 까페에 앉아서 계속 투닥투닥 - "거기 아냐", "돌려", "아니 다른 방향", "좀 있어봐"를 난발하게 되는 '좋지 않은 스티커 책'이었다.

까페에서 책을 덮으며 내가 어디다 버리고 가자고 할 정도였다.  집에 돌아와 누리의 성화의 이기지 못하고 다시 이 책을 꺼냈다가 온 가족 불화로 끝날뻔 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  그래서 누리가 만 7세가 될때까지 이 책을 봉인할 생각이다.  그때가 되도 혼자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되는 책이다.




원래 가고 싶었던 전시는, 전시라기보다, 전시이기는 했지만 도서관 로비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도 찍을 수 없고, 대부분이 원판본 전시라, 사람은 너무 많고, 누리는 찡찡대서 바로 선물가게로 향했다.



앨리스처럼 뒤로 돌아 뒷짐을 지라는데 끝까지 말 안듣는 누리님.



또 배고프다고 찡찡대는 누리를 데리고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햄버거 가게 Shake  Shack로 이동.  근처는 아니고 지하철 타고 코벤트 가든으로 이동했다.  역에서 내리니 맨체스터 시티 팬들이 펍 앞에서 땅을 굴리며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고 있어 한껏 졸은 누리를 데리고 햄버거 가게로 갔다.

가서보니 (거의) 야외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야 했는데, 그것도 일하는 직원이 지정해줬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다른집 가족과 미팅하듯 일렬로 3:3 앉아서 먹었다.  우리가 먹는 사이 앞은 다른 가족으로 또  한 번 바뀌었다.  맛은 있었지만, 너무 추운 곳에서 정신없이 먹어야 했다.  그래서 결국 체하고 말았다는 뒷이야기.  누리는 준비해간 누리용 샌드위치가 있어서 그걸 먹고 감자칩을 나눠먹었다.  2인분만 시킨셈인데, 30파운드 가까이 나와서(음료수도 하나만 시켜 나눠먹었는데) 지비와 내가 깜놀.  둘다 "이렇게 비싼 패스트 푸드는 처음 먹어본다"하면서 허허허 울면서 웃었다.  절대로 레스토랑 아님. 



그리고 다시 세월호 2주기 침묵시위가 열리는 트라팔가 스퀘어로 이동했다.  누리와 지비는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넣어두고 나만.  웬만하면 같이 갈 수 있었는데, 마침 영국정부의 긴축재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려 누리 같은 아동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




훌라후프 돌리며 가는 대열이 꽤 인상적이었고, 'Buy the Socialist here'이라고 적어놓은 부스가 눈길을 끌었다.  좀 사다가 한국에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썰렁 농담).



그리고 가족 수대로, 사이즈별로(S, M, L) 받아온 세월호 팔찌.  'M for 나'라며 찍었는데 팔목에 끼고 팔을 휙 뻗으면 휙 날라가버릴 정도로 크다.  남들보다 먼저 자리를 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먹고, 그 모자이크 스티커 꺼내 싸우다가 하루 마무리.


일요일


전날 햄버거 먹고 체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한다'함에는 동네 놀이터와 마트 장보기, 까페에서 커피마시기가 포함되어 있다.


아침 먹다 테이블에 놓인 박스 티슈가 떨어졌다.  다썼다.  아침부터 창작열이 불타 오르는 누리는 이걸 기타로 만들었다.





자기가 보기에도 허접한지, 자기는 안한다며 지비에게 연주하라고 한다.  그리고 점심먹고 나가 놀이터에서 놀고, 커피도 마시고, 장도 보고 돌아왔다.






구조물이 올라갈 땐 "놓으라"고 "혼자 혼자"를 외치더니 정작 한 걸음 물러나니 "무섭다"고 화를 내는 누리.  다들 누리가 순한 줄 아는데 사실 이런 애입니다.




한국의 가족들은 누리가 축구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하루 아침 나온게 아니다.  봄, 여름, 가을은 주말마다, 일년 내내 집안에서 공을 찬 결과다.  우리집 아랫층이 비어 있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공을 들고 다니기 힘들어 작은 공으로 얼마전에 새로 샀는데, 공이 작으니 차기가 힘들어보인다.




그리고 얼마전 만들어본 파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본 해물카레 파이.  밥 대신 패스트리랑 카레 먹는 기분이었다.  앞으론 이렇게 혁신적인 도전은 하지 않는 걸로.  그냥 닭고기가 무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