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5년

[life] 기름 한 방울의 일기

토닥s 2015. 11. 5. 08:29
런던의 물가는 여행객들에게만 비싼 것이 아니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 차이라면 여행객들은 며칠 아끼다 가면 그만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냥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내 블로그에 등장하는 이웃가족과 우리가 함께 커피를 마신적이 있다. 누리가 백일도 못되었던 때. 지하철역 근처 프렌치 까페에서. 그때 이웃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이 곳(우리가 살고 있는 옆동네)이 참 좋다"고, "이 곳에서 쇼핑을 하고 차를 마시면 나도 마치 부자가 된듯한 기분이 든다"고. 그리고 "이 곳의 채리티 숍에 가면 부자들이 내놓은 헌 옷을 아주 저렴하게 살 수 있다"면서.

그 때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부자가 된 기분이라니'. '우리가 부자가 아닌데 무슨 소용이람'하고 잘라서 생각했다. 아니 잘라서 생각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다녀와서 누리가 만 3세 이후 9월이 되면 갈 수 있는 학교 부설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이전에 갈 수 있는 어린이집을 열심히 알아봤다. 한국에 가기 전에 몇 군데 신청서를 던져놓고 갔고, 돌아와서는 뷰잉을 했다.
정부에서 만 3세 이상은 15시간 무료 돌봄/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 과정생략하고 말하자면, 정부(기초자치) 부설은 그러한데 자리가 없고, 사설은 '내부 규정'이라는 것이 있어 약간의 할인을 받을 뿐 1시간도 무료가 아니었다. 정부 보조를 받아 6시간 혹은 10시간(일주일에 이틀) 맡기는데 한 달 대략 3~400파운드 정도가 든다. 집주변의 어린이집들이 그렇다.
이 현실을 마주하고 깜짝 놀랐고, 그럼에도 사설도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데 놀랐다. 개인적인 느낌은 사설은 정부 지원을 받는 만큼만 아이를 맡기는 사람들에겐 자리를 잘 주지 않는다.

동네마다 다르니까 영국이 그렇다고 일반화 할 수는 없다. 같은 런던의 동북쪽에 사는 지비의 사촌형에게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 대해서 이야길하니 놀랄 정도니.

며칠 이 현실이 나를 끌어내렸다. 내가 살고, 생활하고 있는 이 곳에서 내가 마치 동동 뜬 기름 한 방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서야.
흙에 작은 씨앗 하나 밀어놓고 물만 열심히 주면 싹이 자라듯이 아이가 자란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도 이어서 들었다.

정신차리고 내년 9월 학교 부설 어린이집 자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이틀 동안 인근 학교들에 서류를 내밀었다.
오늘 오후 어느 공립 학교에 들러 서류를 내고 장을 보러 가는 길에 골목골목 들어선 사립학교에서 하교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뒷모습을 봤다. 예전과 다르게 그들과 나 사이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때때로 나랑 지지고 볶아도 누리가 아프지 않고 자라고 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