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생활/Cooing's

[+1138days] 남친의 조건

토닥s 2015. 11. 1. 08:12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시내로 갈 때 사용하는 지하철 노선은 둘이다. 디스트릭트 라인district line과 피카딜리 라인piccadilly line. 그 중 디스트릭트 라인은 집에서 가까운 역에 서고, 피카딜리 라인은 디스트릭트 라인을 타고서 다른 역에 가서 갈아타야 하는 노선인데, 런던 시내 중에서도 한 가운데로 갈 때 빨리 갈 수 있는 노선이다.

시내 한 가운데로 빨리 갈 수 있는 것은 피카딜리 라인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노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바로 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리와 함께 이 노선을 이용하는 게 무척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이 노선은 런던 히드로 공항이 있는 서쪽 6존에서 런던을 가로 질러 런던의 동쪽으로 간다. 지하철은 자주 있지만, 늘 공항으로 혹은 그 인근의 주택가로 장거리 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자리를 양보받기 어렵다.
반면 주로 이용하는 디스트릭트 라인은 객차 자체도 자리가 많고, 런던의 서쪽 3존 4존 주택가가 종점이라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그리고 누리는 늘, 거의 100% 자리를 양보 받는 편이다.

오늘은 우리가 사는 동네 이후 지하철 노선에 공사 구간이 있어서 평소에 서지 않던 피카딜리 라인이 서게 됐고, 그 노선을 타고 시내에 친구 부부를 만나러 나갔다 왔다. 누리와 단 둘이서.
시내로 가는 길엔 한 젊은 남성의 자리 양보를 받았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은 붐비지 않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누리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내가 그 노선을 싫어한다.
심지어 누리는 피곤해하며 반쯤 눈을 감은채로 내 손에 매달리고 내 다리에 기대어 있었다. 누리 앞에 앉은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성은 그 상황이 불편했던지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그는 일명 노약자석에 앉아 있었다(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지비는 왜 그 남자에게 노약자석 양보를 요구하지 않았냐고 그런다). 그의 등 뒤 창에 반사된 휴대전화 화면을 보니 축구 뉴스를 본다.
그리고 내 앞에 앉은 역시 40대 초반쯤 보이는 여성은 열심히 책을 읽고 계신다. 가슴엔 붉은 포피(참전 군인들을 위한 기부의 상징으로 11월에 많이들 달고 다닌다)를 달고.
우리가 가야할 길 절반쯤 이르렀을 때 내 앞에 앉아 있던 여성이 내렸고 누리는 앉을 수 있게 됐다. 마침 불편함이 가셨는지 누리 앞에 앉아 있던 남성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다시 넣고 주변에 시선을 돌린다.

낯선 남자 옆에 앉기를 두려워한 누리 덕에 나도 함께 앉았다. 누리는 내 무릎 위에. 조금 더 한산해진 지하철. 알고보니 그 남성 맞은편에 앉은 임신한 여성은 그의 동반자였다. 임신 7~8개월쯤 되어 보이는 여성은 책을 읽다가 남성에게 시선을 돌리며 잠이 오냐고 물었고, 남성은 그렇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누리와 나의 모습이 다가올 어느 날 자신의 아내와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는데 이 남자에겐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었는지.
한산해진 지하철을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우리가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엉퀸채로 사랑의 대화(?)를 주고 받는 커플도 보인다. 모르는 타인이라도 약자에게 친절할 수 없는 남자친구가 끝까지 그 여자친구에게 친절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누리에게 가르쳐야겠다. 나는 말도 '가르쳐야겠다'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타인이라도 약자에게 친절할 수 없는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고. 그런 사람들은 그 타인이, 그 약자가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이 될 수 있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니까.

친구 부부를 만나 즐거웠지만 도심의 소음에 지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 피곤하고 씁쓸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