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생활/Cooing's

[+966days] 영어 모국어

토닥s 2015. 5. 13. 06:35
우리가 집에서 어떤 음식을 해먹고 사는지 만큼이나 궁금해하는 건 우리가 누리에게 어떤 언어를 쓰는가이다. 나는 한국어를 쓰고, 지비는 폴란드어를 쓰고, 둘이 함께 있을 땐 영어를 쓴다. 하지만 누리에게 하는 말은 각자의 언어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의 영향으로 누리는 영어를 더 많이 이해하는 편이다. 쓰는 말도 그러하고. 우리마저 영어로 대화하니 당연한 것일지도.

영국 영어 British English


누리가 예전에 하지 않던 말을 내뱉을 때 늘 나는 놀란다. 예전 같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앞에 두고 "누리가 누리가" 외칠 것을 얼마 전엔 "I will do it(내가 할래)", " I can do it(내가 할 수 있어)"라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가 주어로 I, You 배우고, 동사로 do 배우고, 조동사로 will, can 배우고, 목적어로 it 나눠 배웠던 것을 누리는 상황에 맞추어 통으로 익힌 것이다. 자기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의 캐릭터들에게서 배운 것이겠지만.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TV는 쉼없이 떠들어주고 엄마인 나는 과묵하니. 다시 한 번 놀란 건 누리의 발음이다.



언니에게서 온 소포박스를 보고 "복스box"라는 거 아닌가. 거기다 누리가 가끔 "that's better(이제 좀 더 낫네)"라고 할때가 있는데, 이런 표현은 대체 어디서 들은 것인지, "댓츠 배터"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부끄러워서 "박스"라하고 "배럴"이라고 하거늘. 하루 아침은 아니지만 영국에 산다고 발음을 바꾸면 내가 우스워지는 느낌이라. 물론 나의 (완전하지 않은) 미국식 발음이나 단어 선택을 늘 지비는 비웃는다.

그래도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땐 늘 발음을 의식하는 편이라 미국과 영국 사이 어디 대서양쯤에서 절충하는 편이다. 그래봐야 콩글리쉬 한국식 영어다만. 그래도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건 can/can't이다. 나는 "캔/캔-ㅌ"라하고 여기서는 "캔/칸-ㅌ"라한다.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 영국 몇 년 살았다고 발음을 바꿔 "칸-ㅌ"라 하기 부끄러워 "캔-ㅌ"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캔 낫"이라고 말해보아도 사람들은 "캔"만 듣기 때문에 역시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다.

하여간 이렇게 나는 나대로 콩글리쉬Konglish, 지비는 지비대로 퐁글리쉬 Ponglish 인데 누리는 영국 영어 발음을 하다니 나로써는 놀라운 일이었다. TV의 힘에 놀라워 해야하나.


아이들의 흡수력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부모들이 '우리 아이가 천재'라는 생각을 한다고. 차마 '착각'이라 하지는 못하겠다만. 지비 같은 깍쟁이도 누리의 언어 흡수력과 사소한 기억력에 감탄하며 "smart baby(똑똑해)"를 연발할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늘 찬물을 끼얹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실 지비로서는 누리만 보니 아이의 성장과 발달이 놀랍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밖에서 다른 아이들, 누리 또래와 견주어 볼 기회가 지비보다 많기 때문에 누리의 언어 발달이 놀라운 수준은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할 기회가 많은 것이다. 누리의 언어 발달은 또래보다 훨 뒤처져 있는 편이다. 누리 정도 나이면 영어만 쓰는 영국 아이들은 기본적인 동사를 알고 쓰며 의사표현이 가능하다. 그게 보통 두 살쯤. 누리는 세 살이 되어야 그 정도에 이르지 않을까 싶으니 한참 뒤쳐진 셈이다. 물론 누리는 영어 말고 한국어를 이해하고 폴란드어도 아주 조금 이해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이 부분에 조급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늘 내 정신을 붙들어매고, 지비가 우리 아이 똑똑해 환상에 빠지지 않도록 찬물을 끼얹어 주는게 나의 역할이다.

누리와 비슷한 또래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서 자기 아이가 참 똑똑하다며 이런저런 경험담, 주로 아이들의 단어 기억력에 관련된 일화들이다,을 자주 듣는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은 다 그런 거라고, 그 정도 되니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게 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될까 참는다. 더더군다나 나도 이제 그 또래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니 조언이라는 게 말이 안되기도 하고. 부모들이 행복한 환상, 우리 아이가 천재라는,을 가지는 건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그런 환상이 아이들에게 부담으로 지워질까 걱정이다.

아이고.. 나부터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