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4년

[etc.] 발렌타인데이, 사랑의 대화 같은 건 없다.

토닥s 2014. 2. 18. 00:04

발렌타인데이 전날 지비가 어쩔꺼냐고 물었다.  어쩌긴 어째, 집에서 밥 먹어야지.  지비는 외식이라도 할까 생각을 했나본데, 걸어서 15분만 가면 각종 레스토랑이 있는 하이스트릿이긴 해도 저녁에 애 데리고 나가서 밥 먹는 건 아직은 모험이다.  한국서도 리스트에 올려둔 식당에 가서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었던 터라 그런 걸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보통과 다름없이 보내겠다 했다. 


그래도 나름 특식을 찾아 낮에 장을 보러 나갔는데, 사실은 누리의 우유를 사러 간김에,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며칠 전 우편함에 들어온 피자X에서 피자를 '처음으로(!)' 시켜보기로 했다.  영국에서 배달음식은 딱히 땡기지 않지만, 한국에서 먹었던 피자X과 미스X피자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터라 시켜봤다.  우습지만, 한국에 가면 꼭 피자를 먹는다.


30파운드 이상 시키면 40%를 할인해준다길래 사이드까지해서 30파운드 꽉 채워서 주문했다.  30분만에 배달원이 덜렁(!) 던져주고간 음식.  오토바이에서 내리기 싫었던 배달원이 내려와서 음식 받아가라길래, "장난하심?"하고 목소리를 높였더니 씩씩거리고 올라와 휙 던져주고 갔다.  배 안고팠으면 당장 환불했다.




근데 이게 뭔가.  한국에서 먹었던 윤기 좌르르 피자의 여운을 싹둑 잘라버렸다.  며칠전에 만든 피자를 데워다 가져다 준 것 마냥 마른 피자와 사이드들.  그냥 '절대로 시켜먹지 말자'는 교훈으로 삼기로 했다.  참으로 교훈적인 발렌타인데이가 아닐 수 없다.



그 와중에 한 입 먹어보겠다고 달려든 누리.  물론 자기 저녁은 일찍이 잡수신 후에.  밥 먹고 난 뒤에 주니 후식과 혼돈을 한 건지 피자를 쭉쭉 빨아먹던 누리.



우리 사이 사랑의 대화 같은 건 없다.


배달음식에 관한 교훈 하나 마음에 담고 지비와 나는 하루 종일 각자 검색한 내용들과 각자의 의견을 나눴다.  차에 관해서.  마시는 차 말고 타는 차.



그리고 누리를 재우고 후식으로 도넛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또 차에 관해서.


올해 안에 2~5년 정도된 중고차를 사자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컴팩트 카.  그러니까 경차.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필요한 차는 그 정도였다.  이런저런 검색 끝에 이미 도요타의 아이고라는 모델을 사겠다고 정했다, 한국 가기 전에.  한국에서도, 돌아와서도 틈틈이 중고차를 검색하던 지비.  자동 기어를 사자고 졸라대던 나.   어쩌다가 할부이자 0%라는 도요타의 광고를 보고 새차를 사볼까? 하다가 새차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중고차를 사려던 예산, 애초 예산의 두 배가 되었다.  그러다가 하이브리드는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일본여행에서 도요타의 아쿠아라는 하이브리드를 탔는데, 연비에 감탄했다.  6일 동안 여행하면서 800키로미터쯤 달렸고, 7천 엔 정도 주유비를 썼다.  약 7만원.  마음이 51%쯤 기운 우리는  생산적인 대화로 발렌타인데이를 마무리하고 바로 다음날 오전 매장에 갔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산적인 대화가 끝난지 12시간 쯤 지났을 무렵 빨간색 하이브리드 소형차 계약서에 싸인했다.


그냥 한 번 실물을 보려고 간 것이었는데, 그렇게 됐다.  둘이서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벌벌 떨었다.  잘한 거 맞지, 맞지 하면서 서로에게 확신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떨리는 일이었다.  중고차를 사겠다는 계획에서 이렇게 일이 커졌으니.  그래도 잘한 걸꺼야, 그래야지 암..


이건 덤.


차 구경을 갔던 우리는 가기 전에 필요한 질문들을 적어갔다.  꽤 구체적인 질문들이었던지, 그래서 우리가 차를 살 것 마냥 보였던지 직원은 점점 큰 폭의 할인을 제시했고 시험운전도 권했다.  지비가 시험운전을 하러 간 사이 나는 누리와 함께 매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라는 게 5분 둘러보고 사는 물건이 나니니, 실제로 계약서를 작성하는데도 정말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 같이 애를 데리고 온 사람을 위해서 아이들 공간이 있었다.   모니터에 Cbeebies라는 유아채널을 켜놓은 것이 다였지만, 옆엔 게임기도 있었다, 그게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다.





가끔 이런 배려에 놀라고, 그렇지 않은 한국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