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1년

[coolture] 여성방송인의 수명

토닥s 2011. 1. 12. 00:55
여성방송인의 방송인으로서의 수명은 얼마가 될까? 

그냥 '언론인'이라고 범주를 넒혀도 그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기자를 직업으로 나이 40세를 앞둔 선배들이 '기자정년' 운운했던 것이 벌써 몇해 전이니까.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데, 방송사에서 기자로 방송인/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다 여성이라는 딱지라고 붙이고 나면 방송인으로서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
현실을 반영하듯 공중파를 제외한 모든 방송사에서는 여성방송인/아나운서를 계약직으로 채용한다지 않나.

조금 전 BBC뉴스채널에서 BBC의 방송인 Miriam O'reilly(53)의 재판 결과 속보를 봤다.


Countryfile이라는 영국의 전원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그녀는 2009년 4월 프로그램이 프라임타임대로 새롭게 편성되면서 진행해오던 프로그램에서 교체되었다.  여전히 라디오채널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프로그램 진행자 교체에 대해 나이와 성에 관한 차별을 이유(ageism and sex victimisation)로 소송을 시작했다.  소송이 시작되고, 14개월이 흐르고 오늘 법원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이에 대한 차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법원이 인정했지만, 성별에 대한 차별은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의 판결에 대해 BBC는 그녀에게 사과하고 앞으로의 작업을 환영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녀는 애초의 원했던 바람대로 프로그램으로 돌아가고 싶고, 자신의 일과 BBC를 사랑한다고 기자회견에서 이야기했다.

Countryfile이라는 프로그램 가끔 본 일이 있는데, 누가 볼까 했는데 프라임타임대로 옮겨 갈만큼 인기가 높았나 보다.
법원 판결후 진행되고 있는 기자회견을 생중계로 십여분 넘게 속보로 보여주었다.   그 속보를 보는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섞인다.

한국의 언론/미디어 환경을 볼때 이런 뉴스를 BBC에서 속보로 보여주는 것, 이렇게 긴 시간, 그 자체가 놀랍다.
내용을 불문하고 그녀는 BBC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람이고, 더군다나 그녀가 BBC를 이긴 재판이다.

사실 법원의 판결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이런 재판을 해도 이 정도의 결과를 얻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혼자 생각인가?

어쨌거나, 그럼에도 우리가 한국 언론/미디어에서 Miriam과 같은 사례를 본 경험이 없는 이유는 그녀와 같은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이들면 방송에서 물러나는 것이 여성방송인에게도, 시청자에게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탓이다.  인기 여성방송인의 경우는 사내채용 기자직에 지원해 방송인/아나운서에서 영역을 이동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전에는 나이든 여성방송인들은 라디오로 넘어가는 것이 수순이었다.  그래도 그런 수순은 요즘에 비하면 양반이다.  이전엔 그래도 정직원인셈이라 어쩌지를 못하고 라디오로 자리를 옮겼지만, 요즘엔 계약직(말이 좋아 계약직이지 비정규직인셈이다)으로 뽑으니 라디오로 옮기는 수순도 없는셈이다.  계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으면 되는거니까.  결혼의 시기, 결혼 공표의 시기마저도 재계약 시기와 함께 가늠해야했던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는 한 후배가 떠올라 무척 씁쓸했다.

재판의 결과가 한국이나 영국이 똑같을 것 같다고 볼때, 그 뉴스를 보도한 BBC가 놀랍다.  더군다나 Miriam은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BBC 라디오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보다 큰 차이가 또 있을까 싶다.  한국에선 방송사고, 사기업이고, 공기업이고 상상하기 힘든 일인 것 같다.  그 차이는 노동조합이 아닐까.

영국에서 BBC는 진보적인 매체는 아니다.  그저 중간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일뿐.  약간 오른쪽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래도  BBC 뉴스에는 흑인 진행자도 있고, 아시아인 진행자도 있다.  한국의 TV 뉴스에선 언제쯤 우리와 다른 생김새의 진행자를 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건 나이든 여성방송인을 방송에서 볼 수 있는 그 다음 단계 또는 그 다음다음 단계가 아닐까 싶다.

갈 길이 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