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21년

[life] 발렌타인데이가 뭐라고..

토닥s 2021. 2. 15. 07:16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상업적 '무슨무슨 날' 건너 뛰고 살던 사람인데 아이 덕분에 제대로(?) 챙기고 산다.  이번엔 발렌타인데이.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그 전날 누리와 쿠키를 구웠다.  발렌타인데이에 만들면 그날 티타임엔 먹기 어려울 것 같아서 그 전날 만들었다.  오전에 반죽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오후에 꺼내서 모양대로 잘라 굽고, 저녁 먹은 뒤에 초코렛으로 꾸몄다.  사실 내가 '사랑이 넘치는 사랑꾼'도 아니고, '베이커'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아이랑 시간 떼우는 기능이 더 많은 활동의 일부라고나 할까.  누리야 미안해.😭

보통 쿠키를 구우면 녹차 아니면 카카오 파우더를 넣는데, 발렌타인데이니까 핑크핑크한 쿠키를 만들어볼까하고 비트루트 가루를 샀다.  푸드 컬러링처럼 아주 선명한 핑크는 아니지만 나름 자연스러운 빛깔이라 그게 더 마음에 든다.

 

 

비트루트와 녹차 숏브레드

 

이제까지는 숏브레드를 만들면 반죽해서, 냉장고에서 식혔다가, 밀대로 밀어서 커터로 잘랐는데 그렇게 하면 누리가 쪼물딱쪼물딱하는 사이 반죽 온도가 올라가서 모양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엔 반죽해서, 밀대로 밀어서 냉장고에서 식혔다가, 커터로 잘라서 구웠다.  반죽이 차가울 때 옮기고 구우니 모양 유지가 잘됐다.

 

남은 자투리 반죽들

오후에 굽고 완전히 식혀서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녹인 초코렛으로 꾸몄다.  한 번 녹인 초콜렛은 다시 일정 강도로 굳는데 시간이 꽤 걸려서 발렌타인데이에 먹기 위해 전날 만들었다.

 

발렌타인데이 아침에 선물을 기대하며 아침 6시 반에 일어난 누리.  그럴줄 알고 작으나마 선물을 준비하긴 했는데, 그 선물에 누리가 실망해서 눈물을 보였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핑크핑크 상자에 담긴 머쉬멜로였다.  누리의 반응에 실망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물에 특별한 기준이나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용성'을 좀 염두에 두는 편이다.  그런 실용성을 기대할 수 없다면 큰 돈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선물도 마틸다 머그컵과 바스밤이었다.  그래도 누리는 좋아했는데, 개학하고 선생님이 온라인 조회에서 어떤 선물을 받았냐고 아이들에게 물었고 아이들의 대답이 닌텐도, 레고, 자전거 그런 것들이니 누리가 좀 기운이 빠지기는 했다.  영국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양말모양의 주머니에 담아주는데 그걸 스톡킹 Stocking이라고 한다(사람 따라 다니는 스토킹 stalking말고요).  요즘은 그런 전통과는 많이 멀어진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누리를 너무 '아이'취급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작은 것에 기뻐할 줄 몰라서 실망을 했다. 

저녁에 잠들기 전에 아침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더니 누리는 소프트한 인형을 기대했었다고 한다.  그 전날 선물이 뭐냐고 물으면서 소프트 한거냐고 물었는데, 머쉬멜로가 소프트하다고 생각한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누리는 소프트 인형일꺼라고 생각했단다.  비싸고 작은 게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원했던 것을 내가 맞춰주지 못한 것이었다.  내게 실용성 제로인 인형은 선물 순위 가장 끝인데, 누리는 아직도 그런 걸 좋아한다.  너무 '아이'로 취급한 게 문제가 아니라 누리는 아직도 '아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정말 아이 취향 맞추기 어렵다는 것. 😑 아침에 선물에 실망해 눈물을 보이기는 했지만, 누리는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실망한 아이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예전에 해달라고 했던 토스트를 구워줬다.  구울 땐 이쁘게 보였지만, 윗면을 익히기 위해 뒤집어 익히고나니 구울 때만큼 이쁘지는 않았다는 솔직후기.

 

 

원래 점심으로 하트모양으로 소세지롤을 구울려고 했었는데, 그러면 달걀이 필요하다, 아침에 토스트를 구우면서 달걀을 다 써버려서 점심은 급변경해서 주먹밥과 컵라면을 먹었다.  대충 먹었지만, 누리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들이었다고 믿는다.  믿을께.🙄

 

티타임에 전날 구운 쿠키와 선물했던 머쉬멜로를 먹었다.  누리가 먹으면서 과장되게 "너무너무 맛있다"고,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도 어찌나 짠한지.  실용성을 최고가치로 두는 엄빠를 만나 '아이다움'을 만끽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누리도 어른되면 알겠지, 먹는 게 남는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