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21년

[life] 렛 잇 스노우

토닥s 2021. 1. 25. 09:22

한국에서도 눈 구경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여기서도 눈 구경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살고 있다.  그래도 별로 불만이 없다.  눈 없는 지역에서 자라서 눈이 반가울 것 같지만, 그건 잠깐이고, 어려운 기억이 더 많다.  차 막히고, 춥고 그런.  심지어 내가 타야 할 런던에서 한국가는 비행기가 결항됐던 슬픈 기억까지.  그런데 이런 건 어른의 마음이고, 아이들의 마음은 다르다.  나도 어릴 땐 눈이 마냥 반가웠다.

이틀전부터 영국 일부지역엔 홍수경보가, 런던을 포함한 일부지역엔 눈예보가 있었다.  이제는 우리와 함께 뉴스(특히 날씨 뉴스)를 보고 듣는 누리도 그 소식들어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창밖 눈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누리였다.  그때 지비는 빨래를 걷어 접고 있었고, 나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꺅!"하고 누리가 눈이 온다며 달려왔다.  하지만 처음 내린 눈은 한 30초쯤 흩날리다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화장실을 청소하러 발걸음을 돌렸는데 잠시 뒤 또 "꺅!".  창밖을 다시 보니 눈이 (부산사람 기준에서) '펑펑'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고, 청소를 다 마치지도 못했지만 일단 집근처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거지, 내가 하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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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들리는지 모르지만 눈이 (부산사람 기준으로)너무 많이 와서 휴대전화를 때리는 소리가 녹음이 됐다.  공원으로 향하다 지비는 길가에 세워둔 차를 내일 아침엔 옮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주차장에 차를 옮기고 공원으로 오겠다고해서 누리와 나만 학교 앞 공원으로 먼저 갔다.  학교와 공원이 가까워지니 우리보다 앞서 나온 사람들의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주변이 조용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우리는 눈 밟는 소리도 녹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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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입구에서 얼마 전 다른 학교로 전학간 누리의 친구와 그 아이의 동생을 만났다.  물론 그 집 아빠도.  누리가 같이 놀아도 되냐고 물어봐서 "거리를 유지해"라고 했지만 그게 될리 있나.  그저 희망일뿐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누리가 친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 아이들이 눈 굴리는 법을 잘 몰라서 (부산사람인)내가 눈 굴려서 눈사람 만드는 걸 보여줬다.🦸‍♀️  그 뒤엔 쇠똥구리마냥 열심히 아이들이 눈덩이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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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놀고나니 나도 장갑이 젖고(장갑으로 옷에 쌓인 눈을 털어냈을뿐인데) 아이들도 옷이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공원에 다른 사람(누리와 같은 학교 학부모)이 눈사람을 너무 멋지게 만들어서 그 눈사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이 나가자고 재촉하는 이 다급한 상황에 당근까지 챙겨온 꼼꼼함에 감탄하면서.⛄

 

 

눈 때문에 봉쇄로 집콕하던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져나와 오랜만에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런 기회가 정말 필요한 요즘이었다.  다만, 다른 가족과 집합은 하지 않고 사회적 거리는 유지해야겠지만. 

3년 전쯤 오늘보다 적은 눈이 내렸을 때 누리와 지비가 작은 눈사람을 주차장에서 만들었다.  누리가 그 이야기를 두고두고 했는데, 오늘의 기억도 오래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