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20년

[keyword] Panic buying - 사재기

토닥s 2020. 3. 22. 09:34

#01 COVID-19 그리고 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살면서 영어단어를 많이 배운다. Grammar in Use에서 보지 못한 영어단어들. 아이들 책이나 노래엔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구어들도 많다. 이번 COVID-19를 겪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재기의 영어표현 panic buying도 그 중에 하나다. 이 단어 이전엔 stocking, stocking up 그렇게 표현하곤 했는데, 영어론 사재기와 같은 행위를 panic buying이나 stockpiling로 표현한다는 걸 알게 됐다.


한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사람들의 사재기는 믿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한 2주 전 호주에서 화장실 휴지 사재기가 시작됐다는 뉴스를 봤을 땐 웃었다. 그 뉴스 뒤 영국에서의 화장실 휴지와 손 세정용 비누, 청소용품, 파스타, 멸균우유, 밀가루 같은 제품의 사재기가 시작됐다. 이 같은 용품을 나는 한달에 한 번 정도, 그것도 할인을 해야 하는터라 별로 장바구니에 담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데 장바구니에 담아서 다른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내가 주로 장을 보는 마트는 뉴스와는 다르게 보란듯이 화장실 휴지며 각종 세정제들을 눈에 보이도록 쌓아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사재기에 동조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이었다. 영국 사람들은 비교적 느긋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난 주 이탈리아가 이동통제를 전국화했고, 곧 이어 프랑스, 스페인, 북유럽 국가들이 휴교에 들어가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주말에 장을 보러 갔다가 텅텅 빈 선반만 보고 돌아왔다. 과일, 우유 같이 당장 필요한 것들만 사서 돌아왔다. 한국인의 집이 그렇듯 우리는 쌀도 있고, 간장도 있고, 라면도 있으니까 당장 급한 식재료가 없었다. 화요일 오후에 장을 보러 가서는 주말보다 더 텅텅 빈 선반들을 보고 왔다. 마침 그날 내가 듣고 있는 교육도 무기한 휴강한다는 말을 듣고 왔던터라 마음이 착찹했는데, 그 텅텅 빈 선반들이 마음에 찬물을 한 번 더 끼엊었다. 왜 우리는 이것 밖에 안되는 것인가.


화요일 이전에 교육의 강사가 어떤 집에 쌓여있는 사재기 영상을 공유했다. 당사자는 이렇게 준비했다고 지인들에게 보여주려고 자기 집안을 찍었을것이다. 키친은 물론이고, 거실, 침실 가득 식용유와 화장실 휴지, 파스타 각종 음식이 발딛을 틈 없이 쌓여있었다. 처음 그 영상을 보고 화 비슷한 게 나기는 했다.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살 수 없구나 싶어서.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영상으로 보여진 집 구조와 가구, 식재료를 보고 무슬림 가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99% 확신할 수 있는 특유의 살림살이들이 있다. 카페트나 좌식 소파 구조가 그랬다. 그리고 잠시 보여진 아들의 얼굴이 그 확신을 굳혀주었다. 그 가정이 지나온 경험과 시간들이 그런 행동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행동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 보다 앞서 영국에서 사재기가 시작될 때 이곳에 사는 지인과 우리들끼리만 동의할 수 있는 아주 조심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이른바 사재기가 비교적 저가형 마트에서 먼저 시작됐다는 점에 지인과 내가 동의했다. 흔히 가는 마트에서 살 수 없는 생필품과 식품들은 조금 고급형이라고 생각되는 마트에 가면 여전히 살 수 있었다.  마트에서도 저가형 제품들이 먼저 나갔다.  건조 파스타가 동이 났을 때도 프레쉬 파스타는 살 수 있었다.  오래 보관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과 가격을 나눠보면 같은 양의 파스타가 가격이 4배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려움의 파도를 더 먼저, 더 세게 맞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확인한 셈이다.


과일, 채소, 우유 같은 신선 식품을 어쩔 수 없지만 장을 보지 않아도 어떻게 5~7일은 살아지겠지 싶은데, 집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지비 입장에서는 텅빈 마트의 선반을 보고서 왜 우리는 장기보관이 가능한 식품이 없는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사재기 대열에 들어서야 하는 건 아니냐고 해서, 우리는 막말하는 가까운 사이니까(?) '문명인/문화인'이 되라고 답해줬다.  덧붙여 추운 새벽에 가서 줄서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꿈도 꾸지 말라고.  감기약도 전혀 구할 수 없는 품목 중 하나다.  그 와중에 집에 쌀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초조해졌다.  집에 먹을 꺼 있다고 떵떵 큰소리를 쳤던터라.  어쩔 수 없이 금쪽 같은 내 시간을 들여 주중에 런던 외곽의 한국마트에 가서 9KG짜리 쌀을 사왔다.  쌀을 두 개 사오라는 지비.  "됐거던!" 답해줬다.  그럼 라면이라도 많이 사오라는 지비.  "짜파게티 5개 사고 녹차국수와 떡국도 샀으니 됐다"고.  그날 저녁 그래도 불안해하는 지비에게 말해줬다.  "우리는 지금 식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중 누군가가 Covid-19에 걸리면 어떻게 이 집에서 나머지 가족을 보호하며 자가격리해야 할지 그런 현실적인 상황을 의논해야해"라고 말했다.  그 뒤 지비는 완전 패닉에 빠졌다.

재배한 곳이 미국이지만 그래도 늘 한국쌀을 고집하는 우리/나라서 런던 외곽의 한국마트까지 가야했다.

영국마트에선 살 수 없는 밀가루.  그래서 요즘은 베이킹도 하지 못한다.  휴교 동안 간식이라도 만들자며 밀가루도 샀다.


그 대화는 누리가 걸리면 셋 모두 자가격리하며 돌보는 것으로, 우리 둘 중 하나가 감염되면 그 사람을 화장실이 달린 방에 격리하고, 나머지 한 사람이 육아와 살림을 다 책임지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영국은 Covid-19에 걸려도 중환자 수준이 아니면 병원에 입원할 수 없다.  특히 우리 같이 젊은(?) 사람들은 감기약 먹으면서 알아서 바이러스를 떨쳐내야한다(?).  감기약 구하기 어려우니 약이라도 배달해주면 너무너무 고마워해야할 상황이다. 

생존배낭 - 이런 건 다른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생존배낭까지는 아니라도 품절현상이 사라지면 구급약이라도 좀 넉넉하게 사놔야겠다 싶다.  알콜 손세정제도 포함해서.  그건 사재기 아니고 상비약으로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