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다.

[day04] 돌봄노동도 돌봄이 필요하다

토닥s 2017. 4. 4. 01:15
한국 오기 전 먹거리 리스트를 만들었다.  아주 중요한 리스트라기보다 그냥 가보고 싶고, 먹어보고 싶은 걸 저장해두었다.  그 리스트에 줄을 좍좍 긋기 위해 매일 같이 나가도 부족한데 오늘은 그 모든 일을 접어두고 병원을 가야했다.

day04

다리가 아파 잠을 자지 못했다고 앞 일기에 썼는데 아주머니들에 둘러싸여 일하는 언니의 의견으로는 허리가 원인일 수 있었다.  아이 키우다 허리 디스크가 많이 온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월요일을 기다리는 동안 폭풍검색을 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한국으로 오는 동안 거의 만석의 비행기에서 운 없이 다른 승객과 나라히 앉아와야 했다.  운이 없다고 썼지만 표를 두 장만 샀으니 어쩔 수 없고 당연한 일이다.  지비의 배웅, 언니의 마중을 희망하면 주말에 출발하고 도착하는 것이 맞는데 주말보다는 평일 비행기가 한산할 것 같아 수요일 비행기로 예약했다.  혹시라도 옆자리가 비면 누리를 눕혀 재울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헛된 희망이었다. 
평일이라 단체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곧 부활절 방학을 앞두고 며칠 빨리 한국과 일본으로 가는 가족들이 많아서인지 만석은 아니지만 승객이 꽤 많았다.  좁은 자리에 누리를 눕히고 다리는 내 무릎에 올려 꼼짝마 자세로 10시간을 날아왔다.  누리가 누워 잔 시간은 6시간 정도.  이제 누리는 좌석 하나에는 눕혀지지 않아 엉덩이가 내 좌석으로 조금 넘어왔다.  그래도 최대한 옆자리의 승객쪽으로 옮겨 앉아 누리에게 더 많은 공간을 주려고 했다.  불편해서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깜깜한 비행기에서 다른 곳을 둘러보니 다른/많은 엄마들의 처지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 엄마들의 아이들은 계속 칭얼대서 엄마들이 난처해했다.  뒤척여도 깨지 않은 누리가 고마울 정도. 
한국에 와서 (허벅지 뒷)다리가 아파도 장거리 비행기 탓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져야 하는데 식탁 앉아 밥을 먹다가도 고통이 감당이 안되 중단해야 할만큼 아팠다.  결국 언니의 안마를 받고, 동전 파스를 줄줄이 붙이고, 타이레놀을 먹고 월요일을 기다렸다.

병원에 가보니 디스크라고 진단하려면 MRI를 찍어야 하지만 물리치료와 약(결국은 진통제)를 먹으며 약간이라도 나아지는지 보잔다.  틀어진 척추와 골반이 원인이라고.  부끄럽지만 틀어진 골반은 오래된 일이다.  10대부터 다리를 교차해 앉던 잘못된 습관에서.  30대가 되면서 의식적으로 다리를 교차해 앉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그 정도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모양이다.  젊었을 땐(?) 틀어진 골반도 큰 무리가 없지만 나이도 나이거니와(흑흑..) 지속적으로 무거워 지는 누리를 시시때때로 안아줘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무리가 된 모양이다. 
이번 한국행을 앞두고 누리가 감정적으로 많이 불안한 몇 주였다.  아빠와 얼마간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의미를 알게 되면서 나에게 더 매달렸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누리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짐싸는 것도 숙제인데 감정적으로 불안한 누리는 더 큰 숙제였다.  그래서 안아달라면 울리지 않겠다는 생각에, 또 빨리 이동해서 빨리 일을 헤쳐낼 생각에 많이 안아줬는데 그것도 허리에 무리가 된 것 같다.


오늘 물리치료도 받고, 근육을 빨리 푸는데 도움이 된다는 수액도 맞았다.  영국에선 아파도 앓아눕지 못할 상황이라 성격만 점점 까칠해졌다, 특히 지비에게.  그런데 정말 다리도 누울 곳을 보고 뻗는다더니 내가 그 격.  엄마가 누리를 봐주셔서 병원에 누워 있을 수 있었다.  옷을 멀리 벗어 두어 휴대전화도 없어 멀뚱멀뚱 누워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골반은 오래 전에 틀어졌지만 돌봄노동이 나이보다 빠른 악화를 가져왔다는 생각.  어서 나아져야 할텐데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생각이 어서 돌봄노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또 다른 돌봄이 필요하다는 생각 같아 처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담사들에게도 상담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돌봄노동에도 적용되는 것이라고 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돌봄노동에도 돌봄이 필요하다.  어서 낫자.

+

정형외과 진료를 기다리며 일년 반 전부터문제가 된 피부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건물의 피부과 진료도 받았다.  본의 아니게 의료관광/휴가가 됐다.  그 진료의 결과는 간단하게 & 보통말로 화장품독과 나이 탓이었다.  흑흑.. 이젠 나도 그런 나이.

이젠 정말 돌봄이 필요한 나이라고 절절히 느꼈다. (운이 좋다면) 남은 반평생을 위해 남은 반평생을 바꿔야하는 기점이 온 것 같다.   조절과 인내 - 내 새로운 친구로 맞아야 할 것 같다.  영국에 돌아가면 몇 가지 도전과 실험을 해볼 생각이다.  그 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 받긴 쉽지 않겠지만 나에게 절실한 변화다.  영국 NHS의 건강캠페인 슬로건처럼 Change for life.  생각이 조금 더 단단해지면, 한 달이라도 해보고 밝힐께요.  한 달만에 중단하면 그냥 묻어버리고.ㅎㅎ

그래도 내 인생에서 커피, 술, 고기는 포기하지 않을테니 큰 걱정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