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금요일 지비의 고모, 한국식으로 시고모님이 돌아가셔서 이번 주 장례식으로 폴란드에 다녀왔다.
시아버지는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 - 시고모님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시아버지에겐 누나가 어머니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식 같은 동생이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그 이후에도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 동생의 아이들을 돌봤다. 지비도 그 아이들 중의 한 명. 실제로 지금의 지비가 있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지비는 아버지보다 고모에게 더 자주 전화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없었던 지비에게 고모님이 어머니였다.
고모님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 지비에게 사촌형이 되는 그 아들에게 고모님은 진짜 어머니였다.
마흔을 전후해서 사별로 혼자가 되신 고모님은 집밖에서는 교사로, 집안에서는 모두의 어머니로 살아오셨다.
몇 해전 폐 한 쪽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신 뒤 통증으로 고통 받으시긴 하셨지만, 정정하셨는데 갑작스런 심정지로 돌아가셨다. 일흔도 되지 않는 나이가 요즘은 돌아가시기엔 너무 젊은 나이인데.
쓰러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땐 사촌형 내외가 그랬듯 며칠 병원에서 몸조리하시고 회복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이틀 뒤 돌아가셨다. 폴란드에 있는 가족들과는 달리 우리는 문자로, 전화로만 그 사실을 들으니 실감나지 않았다. 특히 지비는. 하지만 폴란드에 가서, 누워계신 마지막 모습을 뵙고나니 그제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시고모님일뿐이었지만, 지비네 가족 중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뵌 분이다. 폴란드에 가면 찾아가서 뵙고, 우리가 고모님 댁에 묵은 적도 있고, 또 런던 사촌형네 오시면 뵈었으니.
늘 잊지 않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지비, 나, 누리의 생일을 잊지 않고 카드를 보내주시는 유일한 지비의 가족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아무도 카드를 보내주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더 많이 슬퍼졌다면 너무 철이 없는 소리인가.
장례식 후 식사자리에서 내 옆에 앉은 지비의 사촌은 누리가 이곳에서 폴란드 스카우트를 하고 있다는 걸 고모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사촌은 누리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이 둘인데, 고모님이 보여주신 누리 아기 때 사진을 보고 딸을 가지고 싶어했고, 마침내 작년 딸을 낳았다.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모님은 우리와 폴란드의 가족을 이어주는 집안의 어른이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시고모님이 쓰러지시고, 장례식에 다녀오고 꼬박 일주일 동안 정신없고 바쁘고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 와중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우리가 그런 나이라는 생각. 여러 면에서 '여분'이라는 걸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 한국과는 다른 이곳의 장례를 겪으면서, 폴란드에 한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또 생각을 하게 됐다.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길에 생긴 일까지 많은 생각할 거리가 생긴 일주일이었다.
+
이제 편안하시길-.
시아버지는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 - 시고모님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시아버지에겐 누나가 어머니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식 같은 동생이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그 이후에도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 동생의 아이들을 돌봤다. 지비도 그 아이들 중의 한 명. 실제로 지금의 지비가 있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지비는 아버지보다 고모에게 더 자주 전화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없었던 지비에게 고모님이 어머니였다.
고모님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 지비에게 사촌형이 되는 그 아들에게 고모님은 진짜 어머니였다.
마흔을 전후해서 사별로 혼자가 되신 고모님은 집밖에서는 교사로, 집안에서는 모두의 어머니로 살아오셨다.
몇 해전 폐 한 쪽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신 뒤 통증으로 고통 받으시긴 하셨지만, 정정하셨는데 갑작스런 심정지로 돌아가셨다. 일흔도 되지 않는 나이가 요즘은 돌아가시기엔 너무 젊은 나이인데.
쓰러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땐 사촌형 내외가 그랬듯 며칠 병원에서 몸조리하시고 회복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이틀 뒤 돌아가셨다. 폴란드에 있는 가족들과는 달리 우리는 문자로, 전화로만 그 사실을 들으니 실감나지 않았다. 특히 지비는. 하지만 폴란드에 가서, 누워계신 마지막 모습을 뵙고나니 그제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시고모님일뿐이었지만, 지비네 가족 중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뵌 분이다. 폴란드에 가면 찾아가서 뵙고, 우리가 고모님 댁에 묵은 적도 있고, 또 런던 사촌형네 오시면 뵈었으니.
늘 잊지 않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지비, 나, 누리의 생일을 잊지 않고 카드를 보내주시는 유일한 지비의 가족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아무도 카드를 보내주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더 많이 슬퍼졌다면 너무 철이 없는 소리인가.
장례식 후 식사자리에서 내 옆에 앉은 지비의 사촌은 누리가 이곳에서 폴란드 스카우트를 하고 있다는 걸 고모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사촌은 누리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이 둘인데, 고모님이 보여주신 누리 아기 때 사진을 보고 딸을 가지고 싶어했고, 마침내 작년 딸을 낳았다.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모님은 우리와 폴란드의 가족을 이어주는 집안의 어른이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시고모님이 쓰러지시고, 장례식에 다녀오고 꼬박 일주일 동안 정신없고 바쁘고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 와중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우리가 그런 나이라는 생각. 여러 면에서 '여분'이라는 걸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 한국과는 다른 이곳의 장례를 겪으면서, 폴란드에 한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또 생각을 하게 됐다.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길에 생긴 일까지 많은 생각할 거리가 생긴 일주일이었다.
+
이제 편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