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7년

[life] 모두의 어머니

토닥s 2017. 2. 26. 08:41
지난 주 금요일 지비의 고모, 한국식으로 시고모님이 돌아가셔서 이번 주 장례식으로 폴란드에 다녀왔다. 

시아버지는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나이 차이가 많은 누나 - 시고모님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시아버지에겐 누나가 어머니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식 같은 동생이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하고 그 이후에도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 동생의 아이들을 돌봤다.  지비도 그 아이들 중의 한 명.  실제로 지금의 지비가 있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지비는 아버지보다 고모에게 더 자주 전화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없었던 지비에게 고모님이 어머니였다.

고모님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다.  지비에게 사촌형이 되는 그 아들에게 고모님은 진짜 어머니였다.

마흔을 전후해서 사별로 혼자가 되신 고모님은 집밖에서는 교사로, 집안에서는 모두의 어머니로 살아오셨다.
몇 해전 폐 한 쪽을 잘라내는 수술을 하신 뒤 통증으로 고통 받으시긴 하셨지만, 정정하셨는데 갑작스런 심정지로 돌아가셨다.  일흔도 되지 않는 나이가 요즘은 돌아가시기엔 너무 젊은 나이인데.

쓰러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땐 사촌형 내외가 그랬듯 며칠 병원에서 몸조리하시고 회복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이틀 뒤 돌아가셨다.  폴란드에 있는 가족들과는 달리 우리는 문자로, 전화로만 그 사실을 들으니 실감나지 않았다.  특히 지비는.  하지만 폴란드에 가서, 누워계신 마지막 모습을 뵙고나니 그제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시고모님일뿐이었지만, 지비네 가족 중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뵌 분이다.  폴란드에 가면 찾아가서 뵙고, 우리가 고모님 댁에 묵은 적도 있고, 또 런던 사촌형네 오시면 뵈었으니.
늘 잊지 않고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지비, 나, 누리의 생일을 잊지 않고 카드를 보내주시는 유일한 지비의 가족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아무도 카드를 보내주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더 많이 슬퍼졌다면 너무 철이 없는 소리인가.
장례식 후 식사자리에서 내 옆에 앉은 지비의 사촌은 누리가 이곳에서 폴란드 스카우트를 하고 있다는 걸 고모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사촌은 누리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이 둘인데, 고모님이 보여주신 누리 아기 때 사진을 보고 딸을 가지고 싶어했고, 마침내 작년 딸을 낳았다.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모님은 우리와 폴란드의 가족을 이어주는 집안의 어른이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시고모님이 쓰러지시고, 장례식에 다녀오고 꼬박 일주일 동안 정신없고 바쁘고 그런 시간들이었다.  그 와중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 우리가 그런 나이라는 생각.  여러 면에서 '여분'이라는 걸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  한국과는 다른 이곳의 장례를 겪으면서, 폴란드에 한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또 생각을 하게 됐다.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길에 생긴 일까지 많은 생각할 거리가 생긴 일주일이었다.  

올해 여름 폴란드 여행을 한국의 가족들과 준비하고 있었는데 ,여러가지 상황 때문에 지비의 고향은 가지 않고 한국의 경주라고 할 수 있는 크라코와 서울인 바르샤바만 가기로 얼마 전에 정했다.  올해는 지비의 고향에 가지 못하나 싶었는데, 고모님의 장례식으로 갑자기 가게 됐다.  그래서 고향에 다녀가라는 고모님의 메시지인 것 같다는 지비.  지비는 아직도 문득문득 실감이 안난다고.  일상의 자리로 돌아오면 더 생각이,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우리들의 생일이 되고, 부활절이 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떠올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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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편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