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6년

[etc.] 커피를 찾는 남자들

토닥s 2016. 7. 24. 07:57

누리가 생애 첫 방학을 맞았다.  방학의 전과 후 좀 정신없는 시간들이 흘렀다.  방학에 들어가면 짧으나마 가질 수 있었던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가량의 자유시간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해야 할 것 같고.  허둥지둥하다 시간을 다 보내버렸다.  집은 아직 정리를 마치지 못한채로 상당수의 짐들이 좁은 바닥을 점유하고 있다.  그러다 덜컥 누리가 방학을 맞았고 이를 기념이라도 하듯 날씨가 무척 더웠다. 


35도, 체감 온도는 그 이상 정점을 찍었던 지난 화요일이 방학 전 어린이집 마지막 날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9월 전에 만 4세가 되어 학교과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유치원(여기서는 reception이라고 한다)로 넘어가고 3~4명의 아이들은 학교부설의 어린이집으로 옮겨가고 7~8명의 아이들은 그대로 남아 일년을 더 다니게 되는데 누리는 그 7~8명의 아이들에 속한다.  일일이 아이들을 그룹별로 불러 생일 축하 노래에 '해피 뉴 스쿨 happy new school'을 넣어 불러주었다.




그리고 그 날은 어린이집 교장선생님(head teacher)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이 날로 이 어린이집에서 19년을 보낸 선생님은 은퇴하였다.  누리랑 같이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의 큰 형이 19년 전 이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그 엄마의 요청으로 그 큰 형이 이 날 선생님을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더위에 지쳤던 나도 코끝이 찡했던 순간이었다.



누리랑 잘 놀던 아이들이 이 날을 마지막으로 한 아이는 학교과정의 시작인 유치원 과정으로, 한 아이는 다른 학교부설 어린이집으로 옮겨가게 되어 그날 이후 어린이집 옆 공원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미리 약속하였다.  그런데 유치원으로 가는 아이는 연락도 없이 그날 오지 않았고, 다른 학교부설 어린이집으로 옮겨가는 아이는 엄마가 급한 일이 생겨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냥저냥 씁쓸한 마음이었지만 누리랑 둘이서라도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둘이서 공원 안 까페 앞에 자리 깔고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어린이집에 함께 하고 있는 일본 엄마 둘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나 오후 시간을 함께 보냈다.  평소엔 안녕안녕하고 헤어지는 정도의 사이인데, 세 아이들이 잘 어울려 놀아서 엄마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방학이 시작되었다.  두 달간 누리의 엔터테인먼트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팍팍.  그런데 날씨도 푹푹.  일단 첫날은 수영장으로 갔다.  우리집은 서향이라 오후가 무척 더워 오후에 갔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한국에서 사온 뽀로로 선캡(여기엔 이런 스타일의 모자가 없는 것 같다), 냉장고 나라 코코몽의 아로미 상하복과 가방, 한국 아식스에서 사온 시원한 운동화를 신었다.  지난해 봄, 여름 매주 한 번씩 수영장에 데려갔는데 한국 다녀오고 날씨가 추워졌고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일년 만에 찾은 수영장이었다.  작년엔 혼자 암밴드하고 허우적거리며 떠다녔는데 그 감을 잃어버린 것 같아 좀 아쉬웠다.  막 도착해서는.  그런데 한 30여 분 지나니 다시 허우적거리며 떠다니기 시작해서 '아이들'의 능력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런데 사진은 없다.  수영장이니까.




다음 날은 오랜만에 실내 트램폴린 파크로 출동.  누리는 한 시간 동안 뽀잉뽀잉뽀잉.



그 다음 날은 오랜만에 Y네 레스토랑으로 출동.  맛난 음식 실컷 먹고 왔다 - 김치전을 먹었다.  그런데 맛도 맛이지만 누군가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니 정말 꿀맛이었다.  물론 누리는 이 날도 도시락을 싸야했지만.  '그 정도 쯤이야'였다.



달지 않은 홈메이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누리가 지어보인 '맛있는 표정'.  너무 티가 나서 사람들의 농담처럼 모델은 못하겠구나 싶다.

그리고 주말 - 정말 아침부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거리보다는 뜨거운 햇살 때문에 녹초가 되었다. 


어제 Y네 레스토랑에서 재미있는 일/순간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누리의 아침을 준비하면서 그 순간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커피를 찾는 남자1


우리가 레스토랑에 있을 때 백인여성과 아시안남성이 왔다.  둘이 좀 많다 싶은 양을 시켜 먹더니만 다 먹고 나서,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인데 한국 이민자 관련해 쉐프 인터뷰를 할 수 있냐고 물었다.  Y의 남편인 쉐프님이 바쁜 일을 마무리 지어놓고 올라왔다.  인터뷰 요청자 앞에 앉으면서 Y를 보고 한 말,

"커피 도"

간단한 그 말이 너무 웃겼다.  흡사 우리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같은.  쉐프님은 나와 동향 부산남자.  오랜 외국생활에도 사라지지 않는 본성에 혼자서 막 웃었다.  조금만 더 친했으면 "그러다 말년에 아느님(아내+하느님) 구박 받는다"고 조언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라서 말을 삼켰다.  그런데 너무 웃겼다.  오늘도 혼자서 "커피 도" 그 세 글자 떠올리며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커피를 찾는 남자2


이번 주 더운 날씨는 지난 주에 예고 되었다.  일년 내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이지만,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벌컥벌컥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얼음 얼리는 틀을 사자니 일년에 며칠 쓰고 나머지는 자리만 차지하는 짐이 될 것 같아 마트에서 2kg짜리 각얼음을 샀다.  그걸 산다고 할 때 지비는 "뭘 그런 걸 돈을 주고 사느냐"고.  얼음을 얼려 먹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비는 찬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덥다고 찬음료를 달아마시면 탈이나는 건 지비가 아니라 내쪽이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늘 내가 탈이난다.  늙어서 그런가.  하여간 그래서 "나만 먹을꺼야"하면서 얼음을 샀다.  이번 주 내내 낮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랐고, 체감 온도는 그 이상, 오후 시간 집 안은 그보다 더 더웠다.  그 때마다 얼음 띄운 아이스커피에 헤이즐시럽을 넣어 마셨다.  한 번 정도 저녁을 먹으며 만들어줬더니 맛있다던 지비.  오늘 오후 뜨거운 햇살에 녹초가 되서 더운 집으로 들어와 다시 더운 물로 누리를 목욕 시키니 더웠던지 욕실에서 나와 지비가 그런다.

"우리 뭐 시원한 거 마실까?  얼음 있으면 얼음 넣어서.  커피 같은 것도 좋고."

이 세 마디가 무척 느렸고, 길었고, 흐렸다.  그냥 '얼음 넣은 커피' 마시자고 간단히 말하지. 




추운 날씨를 탓했던터라 더운 날씨를 탓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지쳐서 이렇게 짧은 영국의 여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