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다./World

[hue] 베트남의 고도, 후에

토닥s 2007. 1. 21. 07:31



후에hue는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원조의 서울이었던 도시다. 베트남 친구들은 후에라 하지 않고, 훼라고들 발음한다. 나는 그냥 익숙한대로 후에라고 쓰겠다. 후에는 베트남을 다시 간다면 어디를 가겠니?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꼭 대답에 넣을 도시다. 아름답고, 처참하기 때문이다.

이 탑은 후에 근교에 있는 티엔 무thien mu 사원의 탑으로 후에의 상징 중 하나다. 후에의 기념품에 꼭 들어있는 그림이다. 이 사원의 탑을 사랑의 탑이라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 잊어먹었다. 안될 일이야.(__ );;




티엔 무 사원 입구에 있는 상이다. 한국의 사찰에 있는 사천왕과 같은 역할을 하고 모습도 비슷하다. 내가 카메라를 들이댄건 속눈썹 때문이다. 속눈썹이 실제 동물털로 되어 촘촘하게 되어 있었다. 신기하지 않나.





티엔 무 사원에서 또 유명한 것은 바로 이 차다. 포토 저널리즘 책이나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을 본 사람은 한 번쯤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승려가 가부좌로 분신한 사진을. 그 승려는 티치 광 둑이라는 승려로 이 사원에서 이 차로 호치민 시티(당시에는 사이공)으로 가서 미국의 비호 아래 있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의 부패에 항의를 표하기 위해 분신을 하였다고 돼있다. 그런 차다. 그 사진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은 내게도 마찬가지.





티엔 무 사원의 어린 승려들.



카이딘khai din 황제의 묘다. 동양과 서양이 뒤섞여 있는 느낌인데, 신기한 것 아무래도 검은 빛깔의 돌들이다. 카이딘 황제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고, 단지 사치스런 묘를 보아 인민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정도의 생각만 들었다.







사치스러움, 좋게 말하면 화려함은 묘 내부에 가면 극에 달한다. 칠보와 스테인글라스를 오락가락하는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묘 내부.



도자편으로 장식한 부분. 가우디가 동양의 어디선가 모티브를 따왔다는데-, 하면서 이런데서 모티브를 따간건 아닐까 우리들끼리 쑥떡쑥떡. 개인적으로 스테인글라스보다는 이게 낫더라.(-_- )



사진 한 귀퉁이에 나온 쑤언.(^ ^ )



여긴 뚜둑tu duc황제의 묘다. 이름이 그렇다고 웃었는데, 하여간 그렇다. 뚜둑 황제의 묘에서 유명한 것은 문 앞에 들어가면 바로 나오는 큰 연못이다. 연못 둘레의 풍경이 좋다.
이 사진을 찍은 곳은 후궁들이 머물렀던 곳인가, 매장했던 곳인가 그렇다. 아마도 사진의 이름을 봐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겠다.

이 뚜둑 황제의 묘로 들어가면서 처음 내국인(베트남인)과 외국인의 입장료 차이를 알게 됐다. 베트남에서 외국인은 5배의 요금을 내야한다. 5배라고 하면 깜짝 놀랄 배수지만 실제 금액은 그리 크지 않다. 가난한 여행자들이 그런 이유로 부담스러워하거나 싫어하는데, 나는 웬지 그런 요금율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황제를 기리는 사원으로 연결된 목조건물동에 들어가면 이런 게 있다. 황제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서 사진을 찍어보는. 한국에도 저런게 있지?





베트남 친구 쑤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쑤언이 왜 이런 옷을 입고 사진을 찍고 싶어 했을까가 아직도 의문이다. 어쨌든 자기나라 옷이라 그런지 가장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이런저런 정황과 상관 없이 쑤언이 참 이쁘게 나온 사진이다.



황제의 의자 앞에는 사진찍는 사람들과 여행 중 잠시 앉아 쉬어가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편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책을 열심히 보는 아이가 너무 이뻐서 한 장. 무슨 책을 보고 있었을까?



뚜둑 황제의 묘를 거닐다 발견한 미모사. 방현석의 책에도 나오는 미모사다. 방현석의 책에는 그런 구절이었다. 숲을 향해 볼일을 보았는데,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한 식물이 움직여 당황했다는. 한 번쯤 봤을지도 모르겠다, 만지면 확 오므라드는 잎을 가진 식물. 그런데 그런 미모사의 베트남 이름이 숙녀풀이라고 한다. 방현석의 말인즉 숙녀풀에 대고 볼일을 보았으니 그 풀들이 얼마나 놀랐겠냐는.(^ ^ );;



후에의 원조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

이날 오전은 여행팀과 헤어져 혼자서 홍강을 걸었다. 차만 타고 이동한 여행이라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내겐. 걸어서 홍강을 따라 왕궁으로 갔다. 어슬렁 구경하다보니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 일행은 이미 왕궁으로 들어간 뒤였다. 혼자서 매표소에서 표를 사려고 줄을 섰다. 어떤 사람이 와서 말을 걸었다. "니혼진데스까"였다. 호객 행위를 하려는게 아닐까 싶어 "no"라고 건조하게 말했더니 아주 미안해 한다. 그 사람은 일본사람이었는데 혼자 여행하는 일본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신기해서 말을 걸었다-는, 내용의 말을 한 것 같다.(-_- );;






들어서는 입구는 왕궁이다 싶은데 들어가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부분적으로 복원된 곳들이 있기는 하지만 왕궁이라고 불리는 곳의 대부분은 왕궁 터라고 불러야 맞다. 건물은 없고 프랑스와 미국에 의한 폭격에 무너진 궁터가 전부다.















과연 뭐가 a variety of beautiful structure인지 생각하게 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표현하고 돌에 새긴 사람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를 고철 폭탄으로 없애버린 사람들을 탓하는 것이다.
친구와 쾰른 돔을 보러 간적이 있다. 친구 말이 독일 사람들은, 쾰른 사람들은 연합군이 쾰른 돔을 없애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해한다고, 물론 그 감사는 많은 부분이 반어겠지만. 쾰른 돔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이 파괴됐다. 전쟁이라는 시간적 물리적 공간은 정말 무지의 극치다.








+ 무너진 왕궁 터를 왜 복원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럴 만큼의 경제적 여력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지도 모른다.  문화유적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돈이 든다.  그 만큼의 돈이 없는 문화유적을 보유한 나라들은 입장료만으로는 유지할 수가 없어 결국은 그 관리권한 자체를 팔아넘긴다.  세계 많은 문화유적의 관리권이 일본이나 초국적 자본에게 넘어갔다.  앙코르왓은 일본에게 넘어갔다.  

무너진 왕궁 터를 보면서베트남의 의도였던 그렇지 않던 나는 더 강한 임팩트를 받았다.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울분과 같은 임팩트말이다.  한마디로 "개념 없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