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다./World

[hanoi] 쑤언의 집

토닥s 2007. 1. 20. 06:58




하 노이에서 세 번째 날은 여행의 통역을 맡은 쑤언의 집에 갔다, 쑤언의 풀네임은 보람쑤언.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쑤언은 하노이에서 유학온 학생으로 현재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에 있다. 아, 지난학기에 수료를 하고 현재는 논문을 쓰고 있다. 부산대학교 부설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실시한 교환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연수를 오게된 것을 인연으로 부산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공부하게 됐다. 극동문제연구소에 소장이시던 한 교수님의 부인인 심경선생님이 언니와 같은 학교에 계셨고 그런 인연으로 여행팀을 꾸리게 됐다.

쑤언의 부모님은 하노이 근교에서 교사로 일하신다. 함께한 여행팀이 교사집단이다보니 학교에 가보고 싶다는 의견이 나왔고, 쑤언의 집과 쑤언의 부모님이 일하는 학교에 방문하게 됐다. 여행지는 아니지만 베트남의 보통가정을 가보고, 그래서 베트남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쑤언의 부모님이 차를 내주셨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차를 마시며 교육제도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교육제도라 대단한 것 같지만 의무교육은 몇 살까지냐와 같은 질문들이었다.
오가는 대화에 끝에 미국에 의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쑤언의 부모님은 계속해서 북베트남에 살았던터라 폭격에 대한 기억뿐 별다른 기억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대답을 들을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북베트남에 살면 우리 부모가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크지 않은듯 별 기억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돌아와 각종 자료를 보면서, 그리고 베트남 친구들을 알아가면서 쑤언의 부모님이 손님들을 위한 대답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북베트남 폭격은 정도가 지나칠 정도였고, 전쟁시기와 이후 시기 베트남은 정말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멀리서 온 아들의 손님을 위해서, 그리고 체제가 교육하는 교과서적인 대답을 했을 것이다.

북한에 대해 일종의 연대감을 가지고 있는 쑤언의 부모님들께 남한에 대해서 물었더니 그 역시도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말끝에 남꿕(남한) 대해 아는 것이라곤 '박정희'가 전부라고 말했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보낸 박정희,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남꿕의 인민들에게, 심지어 파견되어온 군인들에게 감정은 없다며 문제는 박정희와 미국이라고 말씀하셨다.

쑤언 부모님의 말씀도 크게 들린 말은 아니다. 30만이나 되는 대부분의 파병 군인들은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벌러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중 다수는 전쟁에서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돌아왔다. 고엽제 후유증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도 있고, 다행히 그것을 피해갔더라도 전쟁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쑤언의 여동생이다. 돌아오는 길에 쑤언의 여동생이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 손으로 접어만든 꽃다발이었는데 그 선물을 한국에 들고 오느라 애먹었다. 그래도 고마워서 돌아와 쑤언의 집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쑤언편에 다시 보내주었다. 이 여동생은 한 두해전 결혼을 했다.



쑤언의 부모님들이 모은 교과서. 현재는 쓰지 않는 옛 교과서들이라고 한다.



부엌. 쑤언의 집은 베트남에서 넉넉한 편에 속한다.



여동생의 방이었던가. 사진의 남자는 안재욱이다.



일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에도 있지 않은가, 한 장씩 떼어쓰는. 반가워하며, 신기해하며 일력을 들춰보다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뭐였냐면 띠, 십이지에 베트남에는 고양이가 있다. 대신 토끼가 없다. 그리고 양 대신 염소가 있다. 안신기해?





쑤언의 집이 있는 동네 입구의 구멍가게. 이런 풍경을 너무 좋아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냥 멀찍이 한 장 찍고 만 것이 지금도 아쉽다. 그 뒤에도 구멍가게를 만날때마다 초콜릿바라도 하나 사면서 계속 찍어댔다. 사람이 없어 아쉬운 풍경이다.



쑤언의 부모님이 일하시는 학교, 초등학교다. 교육은 의무교육인데, 교육에 수반되는 비용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때 방문을 인연으로 여행이 끝나고 남은 경비를 모아 쑤언의 부모님이 일하시는 학교로 보냈다. 그 인연을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일회로 끝난 것이 늘 아쉽다.



떼(설연휴)여서 학교는 비었지만, 쑤언 부모님의 도움으로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사실 교실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그때가 벌써 몇년이냐 20년도 전, 시설보다 못했다.







교실도 둘러보고, 의자에 앉아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책상을 보니 아이들은 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낙서는 우리도 익숙한 것이 아니던가.



회의실이다. 플래카드에 쓰인 말을 우리 발음대로 읽으면 '당 콩 산..' 이렇다. 물론 베트남어로 읽으면 전혀 다르지만. 그런데 그 내용이 공산당 어쩌고 이런 내용이란다. 신기하지 않나.



학교를 둘러보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이 나오셨다, 교감이었나. 둘러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방문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가 오갔다. 다 함께 차를 한 잔 마시는 것으로 학교 구경을 끝내고 하노이로 다시 돌아왔다.



하노이로 가는 길목에 찍은 사진이다. 모터사이클 사고가 났고, 사람들이 사고 현장을 둘러싸고 있다. 베트남에서 참 이해못할 것 중에 하나가 이런 풍경과 문화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관심들이 참 많다. 가령 쑤언과 물건을 사러 들어가면 말투가 달라 어디서 왔니, 그런데 왜 외국인과 같이 있니, 여행은 어땠니 이런 말들이 꼭 오간다. 물건만 하나 사고 가게를 나설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면 지나는 손님들이 꼭 대화에 동참한다. 물건 하나 사는데 대화는 짧으면 10여 분이다, 그보다 길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쑤언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후에 베트남을 여행한 정해 이야기를 들어보니 베트남 사람들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베트남을 여행한 정해는 어딜가나 사람들의 대화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어디서 왔니, 어디를 가니로 시작되어 대화는 끝이 없었다고.
나쁘게 표현하면 참견이지만, 좋게 표현하면 관심인데 이방인인 내게는 약간은 부담스럽게 느껴진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도 참 재미있는 문화인 것 같고, 정감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돌아오는 길은 차가 많이 막혔다. 그 때문에 느리게 차가 움직일 수 밖에 없었고, 그 덕분에 차창으로 많은 것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한국군이 저지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자료들을 읽으며 참으로 부끄러웠고 화가났다.  하지만 화가 난 대상은 민간 학살을 저지른 개개인의 군인이 아니라 파병한 박정희였으며, 전쟁을 만든 미국이었다.  
본질적인 죄인들은 한 치의 죄책감도 없고, 개개인의 군인들은 가해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전쟁과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고 있다.  또 베트남 정부는 실리와 국익이라는 것으로 그런 과거사를 못본채하고 있는 면이 있다.  
여러모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역사다.  그래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이 내마음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런데 그 작업을 끝으로 현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가끔 베트남 친구들을 만나는 것 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