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나다./World

[hanoi] 과거를 닫아도 과거를 잊지 않는 베트남

토닥s 2007. 1. 20. 07:18



베트남 여행은 참 특이했다. 그야말로 별 생각없이 따라 나선 여행이었다. 언니가 가는 여행팀에서 한 사람이 빠지게 되어 예약한 비행기 표가 남은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갈까'하고 생각하다 덜컥 떠나게 된 여행이었다.

여행준비도 그랬다. 베트남을 알고가자는 마음으로 몇 권의 책들을 읽었다. ≪사이공의 흰 옷≫, ≪무기의 그늘≫, ≪하노이에 별이 뜨다≫를 읽었다. 이상한 것은 여행을 준비하며 본 책 중에 가이드북은 없었다는 거. 여행에 가서도 가이드북이 없어 방현석의 책을 꺼내 필요한 구절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그런 여행준비가 관광이 아닌 여행으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전날까지도 언어교육원에서 일로 정신없이 보내다 정신없이 하노이로 날아갔다. 베트남의 서울 하노이는 생각보다 멀었다. 인천에서 5시간쯤 비행기를 타고 갔으니까. 그래도 여행은 언제나 즐거운 법. 읽었던 방현석의 책을 다시 뒤적이며 하노이로 날아갔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다. 공항에 들어서면 다소 엄격한 분위기의 입국장이 나온다. 이용객도 많지 않고 공항이 가지는 분주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 내가 베트남에 왔구나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공항을 나섰다.

그야말로 쏟아지는 햇빛이 아침까지 입고 있다 인천공항에 남기고 온 겨울 코트가 아주 먼 옛날이야기처럼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계절은 넘나드는 여행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돌아올때는 시간에 쫓겨 반바지를 입고 2월 인천에 도착했다. 본의 아니게 항공사 담요를 치마삼아 칭칭 두르고 출국장을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넓다란 공항도로를 달려 민속박물관으로 갔다. 민속박물관은 베트남의 주택구조, 농기구 그런것들을 보여주었는데 그걸 보면서도 내가 간 곳이 베트남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약간 서늘한 기운의 민속박물관 본관을 나와 뒷마당에 가고서야 내가 간 곳이 베트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뒷마당엔 관광객, 공안, 민속의상을 입은 안내원등이 어울려 민속음악에 맞추어 민속놀이가 한참이었다. 한 번쯤 TV에서 보았을 수도 있는민속놀이. 박자에 따라 긴 대를 넓혔다, 좁혔다 하는 놀이고 사람들은 그 사이를 뛰어다닌다. 박자를 모르면 발목이 긴 대에 끼고 말고, 그런 상황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 나의 일행도 몇 명 도전을 하였으나 실패.




호치민 주석이 어린이를 위해 만들었다는 극장에서 본 수상인형극. 발 뒤에 사람들이 긴 막대로 인형을 조작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역동적이어서 재미있게 보았다. 지금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심청전과 장화홍련전과 같은 내용이었던 듯.

사진을 찍으려면 추가요금을 내야한다. 그 사실을 모르고 몇 장을 찍었다.




사실 나는 인형극보다 옆에서 연주하는 전통악기와 그 소리에 확 꽂혀버렸었다. 돌아와서도 그 소리를 잊지 못하고 기억했다 인터넷을 찾아헤맸다. 저 악기의 이름은 단 바우Dan Bau다. 소리가 사람을 어딘가로 끌고 가는 느낌이다. 꼭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소리같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다.
http://www.tienghatquehuong.com/instruments/DanBau.htm




화장실 변기다. 뭘 이런걸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신기했다. 처음에 어디가 앞인가 뒤인가를 몰라 약간 당황했다. 한국으로치면 물 흘러들어가는 홀이 있는 곳이 앞이지만, 그곳에서는 홀 있는 곳이 뒤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이 더 합리적인 것도 같다. 밀어내는데(?) 많은 물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혹시, 한국처럼 거기가 앞인 건 아닐까. 컥.




청와대에 비하면 소박하지 않은가. 베트남 주요 관공서 빛깔이 모두 저랬다. 왜 모든 관공서는 노란색일까. 노란색이 길(吉)함의 상징일 것이라는 추측만. 베트남에선 노란 금귤나무가 복을 상징하여 가정이나 건물의 입구에 많이들 기른다. 들어가본 곳도 아니고, 베트남의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정도였으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그냥 줄지은 베트남 관광객이 인상적이었고, 그들을 보면서 북한을 떠올렸다면 내가 이상한가.



처음으로 발견한 아오자이 차림의 처이. 우리가 보기엔 다 같은 아오자이인데 모양이나 빛깔을 통해 지역과 출신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아오자이에 대한 판타지는 윗자락 옆트임으로 살짝살짝 보이는 허리선이다. 정말 그게 허리를 드러낸 것보다 더 '야릇'하다는. 이런말 하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지는 말아줘.(-_- );;




주석궁에도 사람이 많다. 주석궁은 호치민 주석의 생가를 복원해놓은 것과 실제 거주했던 뒷채가 있다. 뒷채는 베트남식 가옥이라고 한다. 관공서 같은 건물을 두고 베트남식 가옥에서 생활한 것을 두고도 그의 소박함을 칭송하기도 한다.



정원안에 금귤나무. 나도 기르고 싶다, 금귤나무.





사람들이 몰려 구경하는 것은 아래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나무뿌리다. 나무뿌리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아래로 아래로 뻗기 마련인데 위로 뻗으니 신기하기도 하겠지.



기이한 나무뿌리는 호치민 주석에 대한 신화로 풀이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에 씁쓸해하며 찾은 곳이 호치민 주석의 묘였다.



호치민 주석의 묘는 입장에서부터 까다롭다. 심지어 공항보다도 더 엄격하다. 입구에서 인원을 통제하고, 들어가서도 안내에 따라 줄지어 다녀야한다. 옷에 대한 규제는 없었던 것 같은데 모자는 금했던 것 같다. 카메라도 안된다. 그래서 보관함에 카메라 등을 맡기며 찍은 이 사진이 전부다.

관람객은 외국인보다 전국 각지에서 온 베트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호치민 주석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누워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예를 표한다. 예를 표하는 방식은 간단한 묵념이었던듯. 하기 싫은 사람은 안해도 된다, 단 대화와 같은 작은 소란도 금지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체제가 호치민 주석을 버팀목 삼는다는. 탁 깨놓고 이야기하면 이용한다는. 이런저런 책들에서 읽으면 아직도 호치민 주석은 베트남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의 삶 자체가 베트남과 같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로부터 당은 이미 외면당한지 오래다. 외면, 그 전단계는 불신이었다. 반프랑스, 반미국 전쟁을 겪은 전쟁세대가 당과 정부의 주요한 요직에 있었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패로 정치인생을 마감하는 모습들을 가지면서 베트남 인민들이 당과 정부를 불신하게 된 것 같다. 묘를 만들지 말라는 호치민 주석의 유언을 엎고 당과 정부가 만든 묘에 누워있는 호치민 주석. 너무 추워보였다. 호치민 주석의 묘가 있는 회색 바딘 광장이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호치민 박물관. 그야말로 볼거리 가득이다. 베트남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전시 수준도 최상급이다. 박물관 어딘가에 호치민 주석이 보았다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있다는데, 그건 찾아보지 못했다.
같이 간 한 선생님이 당신은 호치민 주석도 좋고, 박물관도 다 좋은데 딱 싫은게 한 가지 있단다. 그것이 무엇이었냐면, 호치민 박물관을 설계한 사람이 레닌 박물관을 설계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이 연대라기 보다 큰 사회주의국가(지어질때는 소련이이었으니까)에 대한 일종의 사대처럼 보이는 것이 싫으시단다. 옳으신 말씀.




호치민 박물관 전시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시즘에 저항한 스페인을 전시한 곳이었다. 스페인의 파시즘 저항에 대해 일종의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스페인을 마주할 줄이야. 얼마전 다시 본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을 지금처럼만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지금도 뭐라고 불어야 좋을지 모르는('스페인내전'이라고 부르기 싫다) 스페인의 파시즘 저항사를 영어로 읽어내느라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전시는 앞서 말한대로 수준급이었다. 작품으로 형상화 한 것은 베트남의 역사, 호치민 주석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징을 누구는 '찬양'이라는 말로 가둘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다.



억압을 뚫고?



각각의 작품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벼였다. 베트남 주식의 기본이며, (농경)문화의 기본인 벼. 그뿐만이 아니라 중요한 계급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는 것 같았다.



호치민 박물관의 화장실이다. 이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이 아니다. 분명 여자 화장실이다.
화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문화적 충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볼일을 보는 이는 없었지만 당황스럽기 이를데 없는 열린 구조였다.




적은 량의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물론 칸칸이 문이 달린 화장실도 있으니 베트남 여행을 너무 두려워만 마시라.



꼭 호치민 박물관을 레닌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 만들어야 하냐고 문제를 제기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호치민 주석이 너무 일찍 죽었다는. 또 옳으신 말씀.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가장 빛날 때, 사람들이 가장 기억하면 좋을 모습만을 가지고 그가 떠나갔기에 그에 대한 존경심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호치민 박물관을 나와 찾아간 곳은 군사 박물관, 전쟁 박물관이다. 베트남의 현대사에서 전쟁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이런 류의 박물관이 반가울 수만은 없다.
이 전시관은 디엔비엔푸 전투 기념관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남 현대사에서 기록할만한 전투다. 70여 년을 이어온 프랑스 강점기가 사실상 이 전투를 고비로 마침표를 찍었다. 물론 곧 이어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됐지만.




한국의 일제 강점기를 대략 39년이라고들 본다. 베트남은 그 두배에 가까운 시간을 프랑스의 지배아래 있었다. 한국은 온전히 제 손으로 강점기를 끝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베트남은 길고 긴 저항을 통해 프랑스 강점기를 끝냈다. 그 배경에는 앞서 말한 농경 민족 특유의 부지런함과 끈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소녀 베트민들.
베트남에서 무기를 들었다고 다 베트콩이 아니다. 프랑스와 일본의 파시즘에 저항하던 시절 민족해방전선과 정당을 베트민이라하고, 분단후 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을 지원한 민족해방전선을 베트콩이라고 한다.




70여 년 강점기를 저항으로 끝낸, 그렇게 강인한 사람들도 미국의 무차별 폭격엔 달리 손 쓸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폭격으로 베트남을 원시시대로 돌려놓겠다는 오만하기 이를데 없는 어느 미군의 말을 읽고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록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조용한 분위기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처럼 느껴진다.



베트남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렇게 말을 한다. 이제 베트남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간다고. 정부 관료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는 쑤언의 부모님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그들의 응답은 체제가 교육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그들의 응답에서 그들이 과거를 닫았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베트남 현대사가 치러낸 전쟁들은 베트남에게는 잊을 수 없고,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이면서 동시에 큰 자랑이다. 우리와 비슷한 현대사를 가지고 있는 베트남이기에 더욱 내게는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베트남에서 과거의 우리 현대사와 오늘의 북한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 여행은 여행이지만 아주 큰 과제를 부여받은 그런 여행이었다.

+ 아주아주 단단히 마음을 먹고 베트남 여행기 정리를 시작했다.  베트남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들을 적고 쓰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 모든 것이 날라갔다.  내 계정 HDD용량이 가득차 더 이상의 업로드를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HDD용량을 늘이는 서비스를 신청하고, 글을 다시 썼다.  그런데 처음만 못하다.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 기억도 안나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같은 일을 반복하자니 4년 만에 베트남 여행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생겨났던 벅참이 사라졌다.  아쉽지만 이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