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6년

[life] 회사는 왜 그럴까?

토닥s 2016. 10. 17. 19:00
지비는 로펌에서 일한다.  아쉽게도 변호사/법률가는 아니다.  로펌에서 일하는 IT 스태프인데, 하는 일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듣자하니 네트워킹 엔지니어라는 것 같다.  역시 잘 모른다.
회사가 자율시간 근무제와 재택근무를 도입한다고 해서 좋아했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는 회사의 변호사/법률가들에게 해당되는 일이고 이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IT 팀이 포함된 비지니스 서포트 파트는 장기적으론 주7일/24시간 , 단기적으론 8am-8pm 지원 시스템으로 운영한다며 근무시스템이 바뀌게 되었다.

두 개의 IT팀이 운영되고 있는데, 그 중 한 개 지비가 소속된 팀에선 원래 1명의 결원이 있었고, 최근 심장질환 돌연사로 동료 한 명을 잃었다.  그래서 지비 포함 3명의 팀원이 있는 팀이 8am-8pm 지원 시스템으로 운영하기 위해 팀장은 3명이 돌아가면서 1주일에 한 명이 8am-8pm 메신저 대기 임무를 가지되 이 사람은 일찍 집에서 일을 시작하는 대신 10시까지 사무실로 출근하고 4시 반에 퇴근하는 시스템 운영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사무실 근무시간 외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발생하면 이 당직자(?)는 12시간을 근무하게 되는 셈인데 초과근무 시간에 대해서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는 지비의 질문에 이미 임금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팀장이 답을 한 모양이다.  집에 돌아와 계약서를 확인한 지비는 근무시간은 주 5일 하루 7시간 30분이지만 이는 비지니스 환경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는 한 줄의 글을 찾았다.  그럼 로펌인데.  그런 문구가 없었다고 해도 회사는 언제든지 새 계약서를 내밀고 사인 할꺼면 하고 말꺼면 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로 지비는 주말 내내 없는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고민했다. 

지비의 언어로 상황을 전해 들은 내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니 지비가 매니저의 글을 내게 보내주어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매니저는 초과근무에 대한 사항만 빼놓고 새로운 시스템 운영에 대해서 꼼꼼히 설명해 놓았다.  그래서 좀 곰곰히 생각해봤다.  왜 회사는 다 이 모양인지, 왜 중간 관리자는 다 이 모양인지.

회사는 피고용인들을 배려하고 업무의 효율성을 기한다며 자율 근무제나 재택 근무를 도입하면서, 회사가 보살펴야 할 피고용인의 범주를 변호사/법률가로만 봤다.  비지니스 서포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노동자가 아니라 부품이나 소모품이냐.  한국에서는 이런 문제가 정규직/비정규직의 문제로 치환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중간 관리자인 매니저는 그런 회사의 입장을 그대로 들고와 꼼꼼한 운영 플랜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공지했다.  그는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스태프들을 챙겨야 할 자리에 있다는 점을 잊었다.  회사의 이익과 함께 팀원들의 이익도 대변해야 자기가 사람 구하러 여기저기 에너지를 쏟지 않고 일에 몰입할 수 있다을텐데.  그런 시스템이 도입되면 직원들은 다들 새로운 직장을 찾아나설 게 분명하다.

지비에게 나는 너네 매니저의 입장이 이해가 안간다고 했고, 내가 한국에서 이 같은 문제에 마주친다면 싸우겠다고 했다.  다만 회사를 떠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는 사실이 있으며 시니어 엔지니어인 네 입장에서는 너보다 경력이 짧은 다른 직원을 위해 네가 나서야 하는 것도 맞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도 아니고, 지비도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이런 규정과 감정이 뒤얽히는 일을 해결해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지비 일명 공돌이+남자사람.
그래서 싸우겠다는 건 내 입장이지만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라는 경기 불안 요소로 경제가 흔들리는 이 시점에선) 그게 어렵다면 매니저를 네 편으로 만들어보라고 했다.  네가 비지니스 지원팀의 근무환경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그가 싸우도록.  그게 중간 관리자의 역할이다.  하긴 나도 한국에서 이런 중간 관리자 본적이 없다.  그런 중간 관리자가 지구상에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계속해서 석연치 않아하는 지비에게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보라고 했다.  일본 무술인 아이키도를 운동삼아 하는데 그 운동만 20~30년씩 한 사람들이다.  우연찮게  IT에 종사하고 있으며 매니저 이상의 포지션이거나 그 이후 프리랜서로 일하는 사람이 둘 있다.  심지어 한 사람은 폴란드인.  매니저 직급으로 일하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는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그의 조언은 참 실용적이었다.

회사가 금전적 보상, 초과근무에 대한 보상을 할 생각이 있으면 처음부터 제시했을텐데 그렇지 않은 이상 다른 것을 요구하라고 했다.  예를 들면 고가의 업무 관련 교육이나 대체 휴일.  업무 관련 교육은 만일의 경우 지비가 회사를 떠나게 되더라도 지비에게 남게 되고, 회사가 이를 아쉽게 여기게 되면 연봉을 올려서라도 지비를 잡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더 재미있는 조언은 이런 제안은 일대일로.  지비가 팀원 전체의 보상을 요구하면  매니저나 회사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한 명 정도는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 대목에서 나는 선비 같은 선생이 프리랜서로 대가족을 꾸리며 먹고 사는데는 다 이유와 재능이 있구나 싶었다.

일단 이 정도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지비는 지난주 요청한 매니저와의 면담을 어제 가졌다.
(글을 이틀에 걸쳐서 쓰고 있는 중)

면담에서 3분만에 지비는 면담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다른 팀원들은 의견이 없는데 왜 너만 - 으로 시작한 매니저의 대화로부터.  그래서 고분고분 매니저의 설명을 다시 듣고 나온 지비.  어쨌든 매니저는 이해가 안되는 직원을 이해시킨 것 같아 기쁜마음으로 자리를 마무리했고, 지비는 매니저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확인하게 된 것 같아 선명하게 포기하게 됐단다.

서로 깔끔하게 정리했는데 퇴근 전 지비의 근무태도가 충분하지 않다며 HR팀과 동승한 미팅을 매니저가 통지했다고 한다.  지비가 보여준 내용을 보니 업무에 관련한 것은 없고 정말 '태도'에 관한 것들만 있다.  회사는 업무와 관련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직원을 공식적으로 징계하거나 해고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기에 지비는 콧웃음을 웃었지만 매니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인가하고.

나는 사실 이전에 있었던 근무평가에서 업무에 대한 평가는 없고 소셜스킬이 떨어진다는 매니저 평가 이야기를 듣고 그 부분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손해날 일을 켤코 하지 않는 영국 사람들이 이 새로운 근무시스템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는데서 다른 두명의 영국 동료들과 이미 매니저는 이야기를 나눈게 아닌가 생각했다.  지비의 경우는 담배도 피지 않고, 퇴근 후 술도 마시지 않고, 그들이 침튀기며 나눈다는 축구 이야기에도 끼지 않으니 그 사람들과 업무 이외의 닿는 면이 확연히 적기는 하다.  그런 잡담 시간에서 업무 관련 이야기들이 오갈법도 했다.  한국처럼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아직 그 근무태도 관련 미팅이 있지는 않았지만 회사들은 왜 이렇게 밖에 운영되지 못하고, 중간 관리자들은 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는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비슷한 고민을 가진 한 친구는 결국 그 고민들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해도 염두에 두고 같이 모색할 수 있는 동료들을 찾아 회사를 만들었다.  그 친구도 지금은 자기가 싫어하는 관리자가 되어 직원들의 뒷담화에서 씹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회사라는 게 그런 조직밖에 될 수 없는 것인지 여러가지 생각이 든 며칠이다.

그래서 지비의 결론, 내게 한 선언은 그렇다.  이 회사에서 고비를 넘기도록 애는 써보겠지만 그 다음 이력은 프리랜서로 찾아보겠다고.  이제까지는 프리랜서라는 불투명한 전망을 반대했는데, 이번에는 그러라고 했다.  지금도 많지 않은 지비의 머리숱이 더 적어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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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뜬금없이 큐가든의 하이브 - 벌집 조형물 사진.
글에 맞는 사진은 없고 벌집-조직사회 억지로 끼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