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5년 54

[life] 이브 eve

지비가 아프다. 내일이 생일이라 회사엔 병가를 내고 바닷가에 놀러갈 계획을 세웠는데. 다음주까지 일하고 그만둘 회사라 마음이 이미 떠난 지비씨. 그런데 요며칠 극도로 까칠했던 아내님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사온 것이다. 케이크를 본 누리의 반응 - 환희. 케이크를 먹어봐서가 아니라 케이크에 대한 반응을 TV에서 배운 것이다. 생애 처음 먹어보는 초콜렛과 케이크. 티끌만큼 먹어보고 "poo! yucky! (똥 같아)"를 반복하더니 잘게 자른 다음 비벼비벼로 마무리. 좀 아깝긴해도 초콜렛 케이크에 달려드는 것보단 나은 반응이라 그냥 뒀다. 내일 바닷가 나들이는 어쩐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런 남편이 아니었는데. 꽃과 카드까지 챙긴 걸 보면 지비가 정말 아픈 것 같은데. 그나저나 사람은 가끔 (무섭게) 까칠하..

[etc.] 병(甁)의 병(病)

병(病)이다. 여름만 되면, 맛있고 값싼 과일을 보면 병(甁)에 담아 술을 담고 싶다. 자두가 맛나보이고 가격도 좋아 한 통 샀다. 12개쯤 들어 1.25파운드. 잘라보니 650g쯤. 65g의 설탕과 잘 섞어 병에 담았다. 한 달 뒤쯤 자두를 걸러 꺼내주고, 그로부터 다시 2주 뒤쯤 맑게 걸러 보관해야는데 이래저래 좀 늦어질 것 같다. 작년 여름 같은 방법으로 포도를 담았는데 일년 동안 봉인했다. 사실 크리스마스에 열어 마시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다. 며칠 뒤에 열어봐야겠다. 식초가 되었으면 어쩌지? 그럼 몸에 좋다고 생각하고 마셔야지. 홍초도 사마시는데 뭘.(^ ^ );

[life] 내일도 벌서러 갑니다.

지난 달 런던에서 열리는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침묵 시위에 가기 위해 서둘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지비가 물었다. "이 침묵 시위는 언제 끝이 나는지". "참 좋은 질문"이라 답해주고 한국 일본대사관 앞에서 20여 년 넘게 열리고 있는 수요집회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지비의 표정은 그야말로 '헉!'이었다. 나는 수요집회도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고,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침묵시위도 그만했으면 좋겠다. 모여서 이런 걸 더 이상 요구할 일이 없어질만큼 일본군강제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가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세월호 사고의 진상이 밝혀져 가족 잃은 분들이 더 억울함과 서운함이 없었으면 좋겠다. 지난 달 침묵시위가 열렸던 날은 지비가 시간 외 근무를 위해 인터넷을 통한 업무가 늘 가능한 환경..

[life] 되찾은 친구

친구가 있(었)다. 이곳에 살게 된 초기 요가를 하면서 알게 된 친구다. 우리가 만났을 때 막 아르헨티나에서 직장을 따라 이주해온 친구였다. 짐에서 진행되는 요가 수업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거르지 않고 하는 사람들은 그 친구와 지비 그리고 나 뿐이었다. 사람들은 늘 들쭉날쭉했고 우리는 십여 개월을 매주 두 번씩 함께 했다.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부터 영어에는 어려움이 없던 친구라 이곳에 금새 적응하는가 싶었지만, 친구가 없었다. 하지만 특유의 다정다감함으로,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이다, 직장 동료들과 걸그룹(?)을 만들어 펍도 다니고, 그 중 한 친구와는 집도 함께 세를 내어 살기도 했다. 그 집에서 열리는 바베큐나 파티에 우리도 가끔 놀러가 친구의 친구들도 몇 번 ..

[etc.] 과일단상

바로 며칠 전까지 런던은 초봄처럼 추웠는데, 어제 오늘은 초여름 같다. 이제 여름인가 싶은데 영국의 여름은 한국의 봄만큼이나 짧게 느껴지니 제대로 즐겨야 한다. 높아진 기온 말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 과일값과 맛이다. 일년 내내 똑같은 과일을 장바구니에 담을 수는 있지만 그 가격과 맛은 참 다르다. 아무래도 봄과 여름이면 과일이 싸고 맛있다. 요즘이 그렇다. 과일을 밥만큼이나 많이 먹는 누리라서 정말 사서 채우기가 바쁘다. 사과 같은 건 오래 가지만 요즘 즐겨 먹는 딸기, 라즈베리, 블루베리 같은 건 3일을 못가니 그 주기로 장을 봐야한다. 사실 빵, 우유, 과일 같이 많이 먹고 유통기한이 짧은 식재료 때문에 거의 매일 마트를 들락날락한다. 운 좋으면 이틀에 한 번. 그런데 이 과일들은 가방에..

[etc.] 작지만 큰 것들

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하이드 파크 안에 있는 놀이터를 다녀왔다. 다이애나 기념/추모 놀이터이다. 작년에 쓴 글이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참고하시고( ☞ http://www.todaks.com/1100 ). 놀이터 밖 하이드 파크 공원 잔디밭에 앉아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가는 길에 화장실을 잠시 들렸다. 줄을 섰다 화장실에 들어서니 좌변기가 터무니 없이 낮다. '기분이 이상하네'하며 볼일 보며 생각하니 그 터무니 없이 낮은 변기가 어른과 아이 겸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변기의 높이가 내 무릎 근처라면 그 변기는 무릎 약간 아래 종아리 근처 높이였는데, 어른들에게 낮기는 해도 아주 못쓸 정도는 아니었고 아이들에게 높기는 해도 쓸만한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백화점 같은 곳에서 아이용 변기를 볼 수가 있었다. ..

[life] 선물

지난 주 K선생님이 계시는 길포드라는 도시에 다녀왔다. 런던의 외곽 도시인데 부산으로 치면 창원이나 마산, 진주쯤 거리. 벌써 오래 전에 한 번 보자고 연락을 주셨는데 시간이 안맞아서 아이들 중간방학 뒤로 미뤘다. 내가 누리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과 선생님의 생활반경 중간쯤에서 만나려다 선생님 댁으로 가서 뵙게 되었다. 다음을 위해서 내가 운전해서 다녀왔다, 조수석에 앉은 지비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집밥을 해주시는 동안 정원에서 누리랑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밥은 정원에 앉아서 먹고. '아 영국사람들이 이래서 정원을 좋아하는구나' 싶지만, 그것도 여건이 되어야 바람대로 살아지지. 경제적 여건 말이다.정원에 워낙 볼거리 만질거리 놀거리가 많아서 누리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점심이 마무리 되었을 때 선..

[book] 416세월호 민변의 기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2014). 〈416세월호 민변의 기록〉. 생각의길. 세월호와 관련해서 나는 많은 글이나 뉴스를 보고 읽지는 않았다. 그리고 희생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정말 의도적으로 피했다. 많은 글이나 뉴스를 중복해서 읽으며, 그리고 가슴 아픈 희생자들의 사연을 읽으며 감정을 증폭시켜 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갑게 이 사건을 보고 기억하고 싶었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내가 주문한 책들과 함께 한국에서 언니가 보내 준 책이다. 책을 받아들고 망설이다 받은 책 묶음 중에서 가장 먼저 골라들었다. 세월호와 관련한 뉴스들, 글들을 따라 읽은 사람이라면 새로울 것이 없는 책이다. 조금 차분한 목소리로 묶어낸 기사 같기고 하고, 조금 쉽게 풀어낸 법정 공방문 같기도 하다. 차분하..

[keyword] Eurovision Song Contest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벌써 한 시간째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Eurovision Song Contest를 보고 있다. 기다린 것이라기보다 저녁을 먹으면서 시청 중인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 기다린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일주일 라디오에서 아침저녁으로 영국대표곡이 흘러나왔는데 나도 모르게 은근 중독된 느낌이다. 노래가 단순하니 통속적 재미가 있다. Electro Velvet 'Still In Love With Youhttps://www.youtube.com/watch?v=s6r1tUhl1cQ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이름 그대로 유럽 국가들이 모여 겨룬다. 신인가수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해당국가에서 이미 활동 중인 사람들이 나온다. 몇 해전 러시아는 할머니팀을 내보내기도 했다. 최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마구 ..

[life] 시찌프스 가드너

누리가 아기 때까진 그래도 키우던 화분이 몇 개 됐다. 그리고 해가 지나면서, 지난 겨울을 넘기면서 집안의 화분이란 화분들은 다 죽었다. 애 하나가 나의 젊음(?)은 물론 나무들의 기운까지 다 받아 자라는 모양인지 어쩐 것인지. 지난 겨울 언니님 편에 한국에서 엄마가 보낸 쑥갓과 깻잎 씨앗을 받았다. 아, 이거 불법인데. 쑥갓과 깻잎을 런던에서 구할 수는 있으나 먹어버리기엔 너무너무 비싼 것들이라. 꽃 뭐 이런 것 다 없애버리고 이 두 가지만 집중적으로 재배(?)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틀에 걸쳐 말라 죽어 있는 화분들을 다 정리하고 흙들을 모았다. 막상 두 가지만 심으려니 심심할 듯해서 누리가 좋아하는 토마토 모종 두 개를 사왔다. 누리가 태어나기 전에 토마토를 씨앗부터 키웠는데 포도알 만한 토마토 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