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7년

[20170519] 밥상일기

토닥s 2017. 5. 20. 07:09
영국에 돌아온지 열흘인데 저녁 10시에 잠들지 않고 있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저녁밥과 함께 마신 커피 덕이다.  할 이야기, 밀린 사진은 너무 많지만 오늘은 간략하게 밥상일기.

한국에서 사온 녹차라떼.  여기는 없는 품목이라 사봤는데 달아서 나는 못마시겠다.

한국에 다녀오니 냉장고엔 폴란드 식재료만 가득.  그래봐야 햄, 치즈 뭐 그런 것들이 전부였지만.  당장 식재료를 사러 나갈 기력은 없고, 먹을 건 없고 그랬던 며칠이었다.  지비가 사둔 닭가슴살 - 나는 이제는 먹지 않는 부위 - 를 오븐에 구워서 허니머스타드 소스와 함께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역시 닭가슴살은 별로다.  텁텁.

집에 쌀도 없어서 지난 주말 당장 한국마트에 쌀을 사러 갔다.  간김에 김밥을 사서 공원에서 먹었다.  영국에서는 올해 첫 피크닉(?)이 아닌가 싶다.

어쩌다보니 런던 근교의 대형한국마트 두군데를 다 들러 각각 김밥을 샀다.  그런데 K마트의 그냥 김밥이 H마트의 불고기김밥보다 더 맛났다.  구관이 명관인 것인가.  H마트는 상품이 골고루 있어 지비가 좋아하는데 조리된 식품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모두 별로였다.

김밥 먹고 연날리며 또 싸우는 부녀.  지비는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다하고, 누리는 자기가 하겠다하고.  결국 누리의 대성통곡으로 마무리된 연날리기.  지비, 그건 누리 장난감이야.

한국마트에서 장본 날은 늘 생고기를 사다가, 주로 쇠고기를 사다가 구워먹는다.  영국마트에선 결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통통 잘라낸 부위를 파는데 한국마트엔 부위별로 결을 살려 자른 고기를 판다.  문제는 우리가 그날 그날 먹은 부위의 이름과 맛을 연결해서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지만.  이날 먹은 부위는 살치살이었는데 맛났다.  잊지말자고 찍어본다, 살치살.

영국에 돌아오고 어린이집에 영 적응하지 못하는 누리.  속상해서 MSG로 원기충전.

지난 화요일 아침도 누리는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집에 가겠다고 징징.  영국인 선생 한 명이 감당할테니 그냥 가라고 해서 다급하게 안녕하고 우는 누리를 뒤로하고 어린이집을 나왔다.

무거운 마음으로 어린이집 앞에 세워둔 차 안에서 잠시 앉았다가 누리 발레 수업에 필요한 타이즈를 사러 상점들이 몰려 있는 곳에 갔다.  원하는 물건이 없거나, 색상이 없거나, 사이즈가 없거나해서 몇 군데를 들른 다음 겨우 적당한 타이즈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까페에 앉았다.  우는 아이 남겨두고 나왔는데 배도 고프고, 카페인도 고파서 요거트와 싱글마키아또를 주문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요거트를 퍼먹으며 이북을 읽는데 눈물이 주륵주륵.  요즘 세월호 관련 책을 읽고 있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안절부절 계속 쳐다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평소보다 일찍 어린이집에 도착해 데리러 들어갔다.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애가 안스러워서 그날 저녁은 좋아하는 우동으로 해주겠다고 했다.

누리 우동은 끓이고 내 우동은 볶았는데 영 먹지를 못하는 누리.  그 좋아하는 우동을 반도 못먹고 겨우 이닦고 소파에 잠들었다.  잠든 아이를 옮기려고 들어보니 뜨끈뜨끈. 
잠시 깨었을 때 해열제를 먹였고, 그 다음날 어린이집은 쉬었다. 

그리고 목요일인 어제는 나아져 예정되었던 어린이집 견학 - 자연사박물관을 다녀왔다.
그래도 오늘 어린이집은 울먹울먹하며 울지는 않았다.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어린이집을 나와 두 군데 장보고, 미뤄둔 집정리를 조금 했다. 

저녁으로 해본 비빔밥.  번거로워 잘 하지 않는 음식인데, 이번에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먹으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대만으로 갈 때 먹은 저가항공의 기내식 비빔밥은 정말 의외였다.  작은 종이 상자에  볶음밥처럼 나물과 섞인 밥이 나왔다.  기호에 따라 고추장의 양만 조절해서 넣으면 되는 식이었는데, 간단함에 놀라고 맛에 놀랐다. 
런던으로 돌아오며 먹은 K항공의 비빔밥 역시 의외였다.  몇 가지 되지 않는 볶음 나물이 이미 밥에 반쯤 섞인 상태로 나왔다.  저가항공에서처럼 기호에 따라 고추장만 섞어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집에서 비빔밥을 준비할 때 썰고, 볶고, 굽고, 데치고 일이 너무 많았다.  생각을 바꿔, '그릇에 담아 놓고 결국 섞어 먹을 음식인데' 내가 미리 섞기로 했다.  채소들도 간단히 당근, 애호박, 버섯, 시금치 차례로 넣고 함께 볶았다.  고기는 불고기 양념에 버무려 볶았다.  프라이팬 하나로 달걀 먼저 굽고, 채소들 볶고, 고기를 볶아 설거지도 줄였다.  그랬더니 식당처럼 밥 위에 가지런히 나물들이 올라간 모양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밥이 가장 마지막에 올랐다, 다 섞어 먹으니 맛은 거기서 거기였다고 '믿기'로 한다.  국 대신 커피로.  그냥 편하게 살기로.

+

중요하진 않지만, 그 동안 밀린 많은 이야기들은 누리가 어린이집에 제대로 복귀하는대로 간간히 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