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생활/Cooing's

[+1740days] 남편은 모른다.

토닥s 2017. 6. 25. 07:57
지난 토요일 나는 시내에 볼 일을 보러가고, 지비는 누리를 폴란드 스카우트에 데려갔다.  데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입구에서 가지 않겠다고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근처 공원에서 둘이 시간을 보냈다.  지비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알지만, 누리를 설득하거나 달래거나 타협하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사실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이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누리의 폴란드어와 그와 관련된 활동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곧 방학에 들어가 두 달간 공백이 있기 때문에 방학 전에 바짝 익숙한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방학 이후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
개인적으론 지비가 지난 주 자기의 점심과 휴식을 포기하고 누리 곁에 길게 머물러줬더라면 누리도 있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지비는 누리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수줍음이 많아서 남겨두기가 어렵다고 한다.  수줍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누리만 유별난 것이 아니라 그 나이 때 많은/다른 아이들도 그러하다고 나는 말했다.  지비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누리가 처음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할 때 일주일 동안의 적응기간을 거쳤다.  처음 이틀 정도는 아이들이 노는 공간에 누리와 함께 배경처럼 있었고, 그 다음 이틀 정도는 누리가 나를 찾아 올 수 있는 공간에 앉아 있었다.  그러면 누리는 놀다가 나에게 오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다섯번째 날은 누리가 보이지는 않지만, 입구 리셉션에 앉아 있겠다고 설명해주고 거기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서 누리는 어린이집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한국에 3주, 6주 다녀오고서 같은 적응기를 다시 반복했다.  물론 처음보다는 하루 이틀씩 짧게.  남편은 그 과정을 모른다.  아니, 말로는 들었지만 그 과정에 있어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으니 모른다.  휴대전화도 쓸 수 없는 공간에서 멍하게 아이 뒤만 시선으로 쫓으며 보내야 했던 시간을.
아이의 성장도 그렇다.  어느 날 설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숫자를 셀 수 있게 된 것이 그 나이가 되서 그런 줄 안다.  일어서기를 시도할 때 수없이 옆에서 잡아주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면 다시 응원하고 독려하며 반복했던 과정을, 1에서 10까지 쓰여진 책을 열 번 백 번 혹은 그 이상을 하고서야 아이가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던 과정을 말로는 안다고 하지만 잘 모르는 것 같다.

오늘 지비는 운동 때문에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떠나면서 미안한지, 거기에 누리를 폴란드 스카우트에 데려가달라고 그런 시도를 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다.  뭐 할꺼냐고 물어서 마트에 장이나 보러 간다고 했다.
지비가 떠나고 누리에게 물었다.  스카우트 하는 동안 내가 옆에 있으면 갈래? 간단다.  그럼 네가 스카우트 하는 동안 운동장에서 뛰어 놀 때 나는 벤치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어도 되냐고도 물었다.  된단다.  그 대화를 세 번쯤 반복하고 스카우트 장소로 갔는데, 벤치를 보고서 날더러 거기에 앉아서 기다리란다.  그래서 처음부터 벤치에 앉아 싸간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비가 내려 건물 처마 밑에 장바구니를 깔고 앉아 이북을 읽었다.  도중에 누리가 단체로 화장실을 갈 때 나와선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운동장에 나와 10분쯤 뛰어노는 시간에도 나와 열심히 손을 흔들다 들어갔다.

남편은 이 과정도 모르겠지.   비가 떨어져 먼지 냄새가 솔솔 피어 오르는 운동장 바닥에 앉아 2시간을 보낸.

운동장에 뛰어노는 사진을 보내주니 어떻게 데려갔냐고 묻는다.  "매직"이라고 말해줬다.

+

육아도 관계다.  아이와 나와의 관계.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 타협 - 희생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 을 통해 유지되는 관계.  부모가 좀 그릇이 되서 그 관계가 수평적이면 더 없이 좋고.  사실 나도 그렇게까지 그릇은 못된다.  엄마들은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하면서 그 관계를 말과 글로 정리하지는 못해도 몸으로 알게 되는데, 남편들은 알기가 어렵겠지.  아쉽게도, 적어도 지비는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