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일기/2016년

[life] 며느리가 뿔났다.

토닥s 2016. 8. 25. 07:29
누리가 매일매일 축구-수영-트램폴린-숲속학교 스케줄로 방학을 보낸지 한 달.  내가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지비의 아버지와 막내여동생이 5박 6일 다녀갔다.  첫날 자정에야 오셨으니 5박 5일 일정.

지비가 누리를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폴란드에 가고 싶어 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여정.  지비네 고향으로 가는 직항은 런던 공항 중에서도 우리집에서 가장 먼 공항에서 출발하고 영국도착이 자정을 넘어 누리를 데리고 여행하기는 어렵다.  예전엔 주 3~4회 항공편이 있는 대신 시간이 조금 나았는데 매일 운항으로 바뀌면서 우리에겐 불편한 시간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반대로 아버지를 모셔오자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이제까지 막내여동생에겐 한 번도 런던에 올 기회를 만들어주지 못해 아버지와 여동생이 오게 되었다.  나머지 두 여동생은 예전에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오고 하루 이틀 지내면서 나로써는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들이 몇 번 목격됐다.

낮에 시내구경을 하고 들어오면 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사이 아버지와 여동생이 나란히 앉아 휴대전화를 쳐다봤다.  한 시간쯤 지나면 아버지는 TV를 켜시고, 여동생은 계속 휴대전화에 시선 고정.

사실 우리에겐 적지 않은 비용을 들어 두 사람을 초대하고 좁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누리를 보여드리고, 누리에게 런던엔 없는 할아버지와 고모를 만나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내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누리를 달래가며 평소 준비하던 식사량 2배를 준비했다.  혼자서 분(?)을 삭였다.  지비는 며칠 동안 내게 완전 '납작자세 모드'였다.

시간이 흐르니 내게도 요령이 생겨 내가 다른 일을 할 땐 여동생 Y에게 "Y야 누리랑 스티커 좀 붙일래?", "Y야 이거 그려서 누리가 붙이게 도와줄래?"하고 구체적인 할 일을 정해주었다.  절~대로 시킨 건 아니다.  도와달라고 했을뿐. ( ' ');; 

그런데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면서 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여동생 Y는 가장 마지막에 일어나고, 일어나면 그 이불을 시아버지가 정리했다.  심지어 휴대전화 배터리가 떨어지면 시아버지가 충전기를 들고와 꼽아주는 게 아닌가.  크던 작던 모든 짐은 시아버지가 들어준다.
이런 장면에 한 번이 아니라 아주 익숙하게 반복된다는 사실에 내가 폭발했다.  하지만 내 딸 아니니까 혼자서 폭발, 자폭하고 말았다.  '나는 저렇게 아이 키우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늦게 얻은 막내딸이라 귀여운 것도 알겠고, 그 막내딸이 가난한 살림에도 뛰어나게 공부를 잘해 특수한 학교에 다니니 기특해 보이는 것도 알겠지만(중학교에 다니는데 일부 수학 과학 같은 과목은 영어로 진행된다고 한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내 딸도 아니고 내가 말도 안통하는 시아버지를 이래라 저래라 가르칠 수도 없으니 자폭했다.  물론 불똥은 지비에게 튀었다.

그러다 일이 났다.  하루 하루 밥도 안먹고 뱅글뱅글 돌며 말 안듣는 누리.  보통은 보던 TV를 꺼버리거나 다그치면 울면서 밥(빵)을 마저 먹는다.

전조가 있었다.  다 같이 둘러 앉아 밥을 먹었고 마쳤는데 누리만 TV에 정신이 팔렸다.  사실 처음에는 시누이와 대화에 빠져 조금 느슨하게 누리를 대했다.  누리가 먹는 속도가 너무 느려 TV를 끄겠다고 지비가 뭐랬더니 "아이 TV본다고 그냥 좀 두라"는 시아버지.  이 정도는 지비도 대응을 한다.  그냥 TV를 껐고 누리는 훌쩍이며 식사를 마치고 TV를 마져 볼 수 있었다.   정말 이건 전조였다.

그리고 며칠 뒤 서둘러 출발해야 하는데 누리가 아침도 다 먹지 않고 TV를 보겠다고 때를 썼다.  심지어 식탁을 벗어나 소파에 앉았다.
내가 낮은 목소리로 다가가 말해도 듣지 않는다.  누리가 다리 뻗을 수 있는 때란 걸 안 것이다.
그 다음은 날카롭고 커진 목소리로 다그쳤다. "너 할아버지 있다고 말 안들어?" 이런 뻔한 다그침.  누리는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목소리를 바꾸지 않고 계속 다그쳤더니 시아버지가 지비에게 큰 소리를 내신다.  눈길도 안돌리고 누리만 보면서 계속 이야기했더니 나로부터 고개를 휙 돌리시더니 크고 낮게 그리고 길게 "흠~흠~"하신다.  맘에 안드신다는 것이다.  사실 속으로 그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쪽으론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지비의 여동생 Y와는 달리 내 딸이니까 내가 감당하는 게 당연하다.

지비네 집안에서는 내가 화도 잘 안내고 순하고 그런 줄 안다.  사람들 참 사람 잘 못본다.  시아버지는 이번에 뭔가 느꼈을테다 말은 전혀 통하지 않지만.
시아버지가 당신의 딸을 대하는 방법을 시아버지라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의 세월을 산 사람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냥 '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비 여동생 Y를 그대로 둬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떠나는 날 아침밥을 다 먹어가는 시점에 말을 꺼냈다.

"부모님한테 잘해라"라는 꼰대(?) 같은 말로 시작했다.
너 잘난 것도 알겠고, 부모님 못난 것도 알겠다.  그 못난 부모님이 밖에 나가면 사랑 받을 것 같냐.  너 아니면 사랑해줄 사람이 없는 분들이다.  네가 네 아버지를 대하듯 누리가 지비를 대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너무 슬프다 - 뭐 그런 말들.
여동생 Y가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하니 시아버지가 처음엔 눈이 휘둥그레.  하지만 영어를 못하셔도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느끼시는 것 같았다.
이번처럼 모든 여행 비용을 우리가 대주지는 못하지만, 런던에 네 힘으로 온다면 우리는 언제나 환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다른 여동생들과 달리 영어로 대화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고.  공부 더 열심히하라는 (다시) 꼰대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참.. 내가 다른 사람 뭐랄 처지는 아니었지만 정말 누리가 그 부녀 간의 분위기를 따라 배울까 무서웠다.


누리가 런던에서 가지지 못한 가족, 물론 지비의 사촌형네가 있지만 고모님이나 오셔야 우리가 가서 뵙는다,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지만 여러 가지로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시월드엔 국경이 없다는 걸 확인한 시간이었다. 
일주일 간의 방문을 위해 우리 한달치 생활비가 나갔으니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되었다.  누리가 좀 더 자라면 우리가 가서 반갑게 만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1~2년 사이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듯.  이번 폭발로 인한 내상을 치유하는데 시간과 거리가 좀 길게 필요할 것 같다. 끙!